늘어가는 공공예술에 이질감을 느꼈던 이유

[서평] 우베 레비츠키의 <모두를 위한 예술?>

등록 2013.05.30 18:12수정 2013.05.30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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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비해 도시는 참 예뻐졌다. 삭막했던 담벼락은 사라지고 꽃이 생겨났다. 듬성듬성 동네 주민들을 위한 공원들도 만들어졌다. 나무도 심어졌고, 조형물들도 세워졌다. 될 수 있으면 색감을 고려한 페인트가 덧칠해졌다. 가끔 길거리 공연도 볼 수 있다. 얼핏 이 모든 것들이 인간적이고 감성적으로도 보인다. 찢어져 있던 무언가가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듯.

그러나 한편으로 허전하다. 눈으로 보이는 것들은 모두 잘 돌아가고 있는데, 마음 한 켠이 찝찝하다. 미학적으로 까막눈과 다를 바 없는 내 비루한 시각 탓이리라. 그런 괜한 생각이라 치부하며 살았다. 도시 공간의 동질화 현상이 완화되어 가는 데, 나쁠 게 무어랴.


그런데 나의 이런 생각이 전혀 부질없지는 않았나 보다. 의식하지 못했던 불안감의 뿌리를 발견했다. 이 책 <모두를 위한 예술?>을 읽고서야 말이다.

a  <모두를 위한 예술?> 겉표지

<모두를 위한 예술?> 겉표지 ⓒ 김병현


저자 우베 레비츠키는 도시학과 공공미술을 연구하는 학자이면서, 현재는 독일 팔켄베르크 국제 미술·사진 전시관의 부관장을 맡고 있다. 독일 역시 한국과 마찬가지였다. 과거 성장기에 완성된 도시의 모습은 단조롭고 비인간적이었다. 마치 그 속에 사는 주민들의 음산한 일상을 묘사하는 듯이 말이다. 기능성만을 우선시했던 새로운 건축물들 사이에서 오히려 개인들의 소외감과 격리감은 커져만 갔다. 소위 '이익 지향적 도시 발전'의 산물은 주민들이 고스란히 떠안았다.

도시 공간의 경제화와 동질화 경향의 결과로 이른바 노숙자, 실업자 또는 이민자 같은 힘없는 부분공중에 대한 소외가 강화되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도심 공간이 자격이 있는 배타적인 부분공중만을 위해 사설화되고 고립된 소비 구역으로 변화되었다. 그렇게 하여 특권층은 원하지 않는 약한 부분공중이나 사회의 취약 상태와 접촉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219쪽)

물론 이를 완충하기 위한 보완재로, 공공미술도 함께 발전했다. 공공미술은 미술 제도로부터 상대적인 자율성을 가진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새로운 도시성을 인간적이고 문화적으로 꾸며내는 데 이용되는 유연한 입지 요건과 수단으로써 도용되는 위험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 위험성이 문제였다. 왜냐하면 수용자 집단이 산술적으로 확대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모든 이를 위한, 민주적 또는 해방적 예술과 직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공공미술에 대한 평가는 조금 달라져야 한다. 미학적이고 예술적인 기준 이외에도 새로운 도시성과 그에 의한 포스트 공공 공간의 맥락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오늘날 공공미술은 무작정 긍정적이거나 또는 여가시간을 채워줄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해주거나 단지 문화적 체험 공간을 창출하는 것만은 아니다. 공공미술에선 새로운 도시성을 체험하면서 안타깝게도 현저히 사라져가는 개인들을 위한 개입적이고 참여적인 실천의 틀 안에서 미술의 기능성은 피하고 비판적 거리에서 비제도적 맥락의 가능성을 이용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본문 11~12쪽)

이러한 고려의 연장선으로 독일에서는 이미 1970년대에 공공미술에 관한 패러다임이 변화했다. 공공 공간에 어울리지도 않는 조각들을 세워놓는다고 해서 도시 미화라는 목적에 적합하지도 않고, 더 나아가 추상미술을 자세한 배경지식이 없는 일반 주민들이 오롯이 이해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책임자들이 인식했기 때문이다.


예술계의 상황도 힘을 보탰다. 미니멀아트, 대지미술, 개념미술 같은 새로운 미술에 관한 논의들이 모더니즘의 반대편에 생겨났다. 그리고 장소특수성(site-specific: 작품과, 그것이 설치되어 있는 환경이 합치되면서 생겨나는 서로 의지하게 되는 성격) 이론의 발전과 함께 모더니즘 미술의 무맥락성 또는 무장소성이 극복되어 갔다.

이를 두고 UCLA 미술사학과의 권미원 교수는 다음과 같이 평했는데, 이는 미술에 의해 도시가 서사적으로 이해되고 체험 가능하게 되어야 한다는 그라스캄프의 주장과도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당시 공공미술 산업에 전념한 사람들은 예술작품의 물리적 배치는 장소가 가진 물리적 조건과 직접적이고 형식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주 좋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접근법에 의하여 공공미술 작품들이 더 다가가기 쉽고 사회적으로 책임 있게, 즉 더 공공적으로 발전하였다." (143쪽)

이후 공공미술은 일상이 가진 특수한 측면과 지역의 고유한 사회문화를 고려하면서 독점적인 고급문화를 향유하는 소수만을 상대로 하지 않고, 공동체 전반에서 일정한 의미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와 관련해 비로소 '모두를 위한 예술'이란 모토 아래 문화 영역에 교육적이고 정치적인 과제들이 부과된 것이다.

진정한 공공미술의 가치? '파크 픽션'을 보라

책에서 꽤나 여러 차례 소개하는 모범적인 공공미술의 사례는 '파크 픽션'이다. 이 프로젝트는 함부르크 장크트 파울리 지역에 시민들이 조성한 공원(2003년 개장)을 위하여 1995년부터 시민운동단체인 '항구부두협회'와 함께 다양한 예술가들이 참가해 이루어졌다.

공원 부지의 건축물은 이미 시청이 주도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부지에 맞닿아 있는 교회 측에서 건축 계획에 대해 항의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마침내 공원을 주민들이 직접 조성하겠다는 요구가 등장했고, 건축을 위해 문화청에서 파견된 작가들도 주민들을 지지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파크 픽션' 프로젝트가 탄생하게 되었고 거리 축제, 여론조사, 토론회 등의 다양한 행사가 열리게 되었다. 주민들은 설계도, 도서관, 설문조사, 행사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해 공원 조성에 대한 그들 자신의 생각을 담아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도출된 긍정적인 담론은, 공원 조성에 공동체가 최대한 활발히 활동할 수 있도록 한다는 참여적인 입장의 발전이다. 파크 픽션이 선택한 예술적 방식은 그 자체로 새로운 장르의 공공미술이 되었다. 통일적 도시주의가 뒤덮고 있던 공공분야에서 주민의 소망과 요구에 따르는 대안적이고 서사적인 도시계획은 무척 획기적인 것이었다.

'파크 픽션'은 더 나은 삶의 질에 대한 주민들의 소망과 요구를 설문 도구를 활용해 구체화하고, 주민들이 권력의 장 또는 지배적인 경제적 이해관계에 대항해 그들의 입장을 요구할 때 그들을 지원한다. 즉 여기에서 예술가를 포함하는 지식인들은 자신의 문화적, 상징적 자본이 없는 주민들의 관심사에 더 많은 의미를 둔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그러한 전략은 민주적 또는 비폭력적 담론을 확립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207쪽)

a  <모두를 위한 예술?>에 소개된 '파크픽션'. 왼쪽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1997년, 2003년, 2005년, 2009년의 모습이다.

<모두를 위한 예술?>에 소개된 '파크픽션'. 왼쪽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1997년, 2003년, 2005년, 2009년의 모습이다. ⓒ 김병현


그러나 이 프로젝트가 순조롭지만은 않아 보인다. 주민들은 도시 구역의 고급화 경향에 대해 지속적으로 저항하고, 다양한 활동으로 성장 우선의 계획들을 저지해오고 있다 한다.

'파크 픽션'의 완성은 관료주의에 기인하는 장애들과 지역 투자자들의 요구로 항상 방해받는데, 공원이 서사적 도시 조성의 시작으로서 또 도시 체험의 새로운 형태로서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고 발전될 것인지, 또는 도심의 엘베 강 풍경에 대한 상황이익을 위해 장기 경쟁에서 경제 영역의 승리와 기업적 도시의 지배적 이익을 의미할 지역의 상류화와 주민의 추방이 초래될 것인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215쪽)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파크 픽션'을 통해 진정한 공공미술의 가치는 약자나 저항자들을 위한 사회적·물리적 공간을 창출해내는 것 이상이라는 점을 책의 말미에서 다시 한 번 분명히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점은 무엇일까.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적인 이질감을 고민해볼 때다.

요즘 지자체에서 지역의 대표적인 명소 만들기에 혈안이다. 전국적인 입소문을 타면 지방 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고, 실제로 성공한 곳도 많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문화유적이야 딱히 손댈 것이 없다. 그러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공공미술을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잦다. 이 시도가 말 그대로 '모두를 위한 예술'인가는 의문점을 낳는다. 공공미술이라는 단어와 굳이 덧붙여야 하는 '모두를 위한'이라는 수식어가 주는 묘한 괴리감은 무엇으로 극복해야 할 것인가. 이 고민에 대한 해법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덧붙이는 글 <모두를 위한 예술>, 우베 레비츠키 지음, 난다 최현주 옮김, 두성북스 펴냄, 2013.04, 1만7천원

모두를 위한 예술? - 공공미술, 참여와 개입 그리고 새로운 도시성 사이에서 흔들리다

우베 레비츠키 지음, 최현주 옮김,
두성북스, 2013


#모두를 위한 예술? #우베 레비츠키 #최현주 #두성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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