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냉면을 좋아 하시나 봅니다.
변창기
매월 납입해야 하는 보험료는 5만3900원이었습니다. 10년 납 100세 만기로 되어 있었고 청약일은 2013년 8월 7일자로 되어 있었습니다. 보험료 납부기간은 2024년 8월 7일까지로, 찾을 수 있는 날은 그보다 20년 더 후인 2044년 8월 7일자로 되어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올해 연세가 69세니 79세까지 보험료를 매월 납부해야 합니다. 그것을 어머니는 여기 저기 아파트 청소를 해 돈을 벌어 납부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새로 재혼한 며느리 앞으로 된 보험이 영 마뜩잖았나 봅니다. 어머니는 큰아들 앞으로 보험을 들어주고 싶으셨나 봅니다. 보험설계사는 다른 약속이 있다면서 간단하게 요약 설명해주고는 자리를 떴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이 언제 죽게 될지도 모른다며 돈벌이가 신통치 않은 큰아들이 계속 눈에 밟혔던 모양입니다. 그렇게라도 해 두어야 마음 편히 살다가 죽을 수 있을 거라 했습니다. 거기서 제가 무슨 말을 했어야 할까요.
"궁진이 엄마 여기 어디에 있는 냉면집인데 그리로 와. 내가 냉면 한 그릇 사줄께."
어머니가 보험설계사를 보낸 후 누구에겐가 전화를 거는데 들려오는 이름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저는 궁금해서 어머니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궁진이네는 우리보다 잘 사는데 왜 엄마가 사주세요?"어머니는 대답했습니다.
"물론 우리보다 잘 살지. 궁진이는 서울로 시집갔는데 부자인가봐. 사위가 궁진이 엄마한데 용돈도 많이 주고 그래. 너희들이 어렸을때 궁진이네 도움을 많이 받았잖아. 경비실 몰래 전기도 주고 호스를 사다 물도 주고 했어."저도 기억납니다. 그리고 참으로 오래간만에 듣는 이름입니다. 궁진이란 여자는 저보다 두어살 어립니다. 당시 국민학교 4학년이었고 부모님은 현대중공업 단층 사택단지 중간쯤 야산에 포장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궁진이네는 앞 주택에 살고 있었습니다. 궁진이 아버지는 현대중공업 생산직에 직급이 있던 분이었고 아버지는 그 사원사택 청소부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저는 어려서 어떻게 궁진이네와 가까운 이웃이 되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궁진이 집에는 흑백TV가 있었습니다. 저와 동생은 여름날 문이 열린 창문 너머에 서 흑백방송을 보곤 했는데, 하루는 궁진이 어머니가 방에 들어와 보라 했습니다.
그 후 궁진이와도 가깝게 지냈습니다. 눈이 작았던 저는 눈이 큰 여자만 보면 좋았습니다. 궁진이는 눈이 참 크고 예뻤습니다. 저는 2년이 지난 어느날 용기를 내어 궁진이에게 편지를 써서 주었었습니다. 아마 좋아한다는 내용이었던 거 같습니다. 궁진이는 부모에게 제 편지를 넘겨 주었고 궁진이 아버지는 저를 불러 뺨을 때리면서 혼냈습니다. 그 후 궁진이 아버지가 겁나서 궁진이에게 접근하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얼마 후 그곳은 모두 허물어졌습니다. 우린 그때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허름한 판잣집을 짓고 살았고 궁진이네는 방어진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 후론 한 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나이가 차고 결혼도 하고 직업을 따라 부산으로 용인으로 서울로 흘러 다니다 몇 년이 흐른 후 다시 울산으로 왔을 때 많은 게 변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집을 나가신 지 3년이 되었다 하고 저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사내하청업체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서울 살다가 정리하고 울산 내려와 살던 해(2000년) 추석 일주일이 지난 후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젊어서부터 술에 쩔어 사시던 아버지는 술에 만취한 채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