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살을 비비대면서 살다보면...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53) #14. 구미 ④

등록 2013.09.29 17:06수정 2013.09.29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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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녀들이 동구 밖에서 놀고 있다. 전쟁 중 헐벗고 굶주린 소녀들이지만 그들의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고 있다(원산, 1950. 10. 31.).

소녀들이 동구 밖에서 놀고 있다. 전쟁 중 헐벗고 굶주린 소녀들이지만 그들의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고 있다(원산, 1950. 10. 31.). ⓒ NARA, 눈빛출판사


동네아이들 잔칫날

김준기가 가축병원 일에 익숙해지자 김교문 수의사는 병원 일은 조수에게 대부분 맡긴 채 대학원 수강과 박사학위 논문 준비에 골몰했다. 그는 무섭게 공부하는 늦깎이로, 쉬는 시간에는  틈틈이 동네 이웃 아이들과 장기도 두고, 때로는 중학생 아이들과 영어 단어 외기 시합도 하며, 스스럼없이 대해 주는 호인이었다.


가축병원 도살장에서 돼지 잡는 날은 동네 아이들 잔칫날이었다. 그날 아이들은 고기도 한 점 얻어먹을 수도 있거니와, 무엇보다 돼지오줌통을 얻어 그것을 축구 볼로 삼아 가축병원 마당에서 동네축구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 무렵 장난감이라곤 구슬이나 차치기, 탄피밖에 없었던 시골아이들에게 돼지오줌통 축구볼은 가장 신나는 노리개였다.

김준기는 구미가축병원 조수시절에도 해마다 8월 15일이면 서울을 다녀왔다. 구미역에서 용산행 밤 군용 완행열차를 타고 밤새 서울로 갔다. 이튿날 서울시청 앞 덕수궁 대한문을 하루 종일 지키다가 그날 밤 용산 역에서 다시 군용 완행열차를 타고 구미로 돌아왔다.

"김 씨, 이제 그만 서울아가씨 잊자 뿌리고 여기서 참한 색시한테 그만 장가 가소."

가축병원 뒷집에 살았던 정길 어머니를 비롯한 마을 아낙들은 준기의 전후 사정을 알고 안타까운 나머지 이따금 밥과 술 대접을 하면서 아픈 마음을 위로했다. 하지만 준기는 늘 묵묵부답이었다.

 미 해군 전투기가 원산 상공을 초계비행하고 있다(1951. 8. 3.).

미 해군 전투기가 원산 상공을 초계비행하고 있다(1951. 8. 3.). ⓒ NARA, 눈빛출판사


대학 부속가축병원


1960년대 초 김교문은 경북대에서 수의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그 이듬해 충남대 농과대학 수의학 교수로 발령을 받았다. 김교문은 교수로 부임한 뒤 곧 충남대 농과대학 부속가축병원 개설에 앞장섰다. 그때 김교문은 조수 김준기를 대학부속 가축병원 실습과장으로 데려갔다.

김준기는 구미에서 8년을 산 뒤 대전으로 떠났다. 김준기는 대전에 간 뒤에도 해마다 8월 15일이면 서울로 갔다. 대전에서 서울은 구미에서보다 거리도 훨씬 가깝고, 특급열차도 자주 왕래하기에 교통이 매우 편리했다. 그때부터 김준기는 당일치기로 서울에 다녀왔다.


김준기가 덕수궁의 대한문으로 최순희를 만나고자 다닌 지 꼭 10년이 지난 다음날이었다. 그날 저녁, 김교문 교수 내외가 김준기를 집으로 초대했다.

"김 과장, 어제도 서울에 다녀왔나?"
"예."
"참, 대단한 열정이다."
"……."

"이제는 마, 그만 포기해라. 내 속단일지는 몰라도 그동안 좀 험한 세상이었나.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고, 헤어졌나. 대체로 전쟁 때는 남자보다 여자 팔자가 더 기구하고, 변화무쌍하더라. 내가 아는 어떤 부인은 남편이 인민군에 부역하다가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자 먹고 살려고 술집 작부가 됐더라. 남편 붙잡으러 다니던 형사들 술 따라 준다 아이가. 그게 인생이고, 여자 팔자다. 김 과장이 10년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 걸로 봐서 그 여자 아마 죽지 않았다면, 십중팔구 남의 사람이 되었을 거다. 그래서 김 과장 앞에 나타나지 못하는 거야."
"늘 벼르면서도 나타나디 않을 수두. 아니면 먼발치에서 보구 있을디두…."
"사람 참 순진하구먼. 하기는 그게 김 과장 매력이지. 그래서 우리 집사람이 김 과장을 좋아한단 말이야. 우리 집사람뿐인가. 구미 장터 처녀들 죄다 울려놓고, 요즘에는 대전에서도 김 과장 인기가 치솟더구먼."
"농담이 디나티십네다."
"아이다. 참말이다. 내가 왜 김 과장한테 씰데(쓸데)없는 소리하나."

 한 소년이 소를 몰고 피난길을 떠나고 있다(마곡리, 1951. 8. 20.).

한 소년이 소를 몰고 피난길을 떠나고 있다(마곡리, 1951. 8. 20.). ⓒ NARA, 눈빛출판사


한 편의 순애보

저녁상을 차리던 교수 부인 장숙자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전쟁터에서 헤어진 연인을 10년이나 한결같이 기다리는 남자는 요새 세상에 드물지예. 시퍼렇게 살아있는 본처를 두고도 첩을 두는 세상에. 김 과장 이야기는 한 편의 순애보라예. 우리 김 과장님 순애보는 박계주가 쓴 '순애보'는 저리 가라 아입니까."
"당신 또 그놈의 순애보 타령이다. 김 과장, 내 단도직입으로 묻겠는데 사실은 우리 처가 쪽에서 오래 전부터 당신을 눈독들인 모양이야. 이제 그만 그 사람 단념하고 새 출발하는 게 어때?"
"저를 생각해 주시는 것은 고마운 일이나 듣디 않은 걸로 하겠습네다."
"아, 사람 참 벽창호네. 언제까지 혼자 살 거야. 사내가 중도 아니고 본능적인 성욕은 어째 참나? 솔직히 난 사나흘도 몬 참는다."

그 말에 장숙자가 김 교수에게 눈을 흘겼다.

"마, 안 그런나. 우리 김 과장이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아무리 그래도 말을 골라 좀 하이소."
"마, 알았다. …그라고 김 과장, 자네 손으로 밥해 먹기 싫지도 않아?"
"괜찮아요. 이제는 이력이 나시우."
"아니야, 남자는 혼자 살면 궁상맞아. 일단 내 우리 처조카를 우리집으로 부를 거야. 어디가도 안 빠지는 미인이데이. 한번 보면 김 과장 마음이 확 달라질 거야. 그리 알아."
"아닙네다. 교수님."
"아니야, 일단 한번 보라고. 왜 노래에도 있지. '정들면 타향도 고향'이라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정들면 다 내 임자야. 모르는 남녀도 서로 살을 비비대면서 살다보면 없던 정도 들기 마련이다. 더욱이 자식새끼 낳아 기르다 보면 더 그렇다."

 수송선(LST)에 입추의 여지없이 가득 탄 피난민들(흥남, 1950. 12. 12.).

수송선(LST)에 입추의 여지없이 가득 탄 피난민들(흥남, 1950. 12. 12.). ⓒ NARA, 눈빛출판사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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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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