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고 바람부는 날, 산에 왜 가냐고

11월 북한산의 꽃, 견공, 솔밭 이야기

등록 2013.11.27 12:00수정 2013.11.29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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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1월 북한산 진달래꽃 모진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꽃을 피우는 나무

11월 북한산 진달래꽃 모진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꽃을 피우는 나무 ⓒ 정민숙


11월 25일 월요일. 아침에 비가 몹시 심하게 왔다. 바람도 불었다. 이런 날. 왜 북한산에 가고 싶은 걸까? 분주하고 바빴던 11월. 그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 그래! 결심했어. 오늘 내게 주는 선물은 북한산 산행이야. 마음을 먹으니 날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 혈관을 둔탁하게 만드는 것들을 부드럽게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도 등산을 해야지. 혹시 몰라 아이젠도 챙기고, 봉지 커피도 챙기고, 스커트(등산 바지 위에 입으면 정말 따뜻하다)도 챙기고... 같이 갈 언니에게 줄 블루베리도 챙기고.


a 진달래꽃 주변 풍경 11월 북한산 모습. 꽃이 필 풍경이 아니다. 소나무 아래 사진 오른쪽이 꽃 핀 진달래 나무. 한 개의 꽃송이를 피우는 나무의 뜻이 궁금하다.

진달래꽃 주변 풍경 11월 북한산 모습. 꽃이 필 풍경이 아니다. 소나무 아래 사진 오른쪽이 꽃 핀 진달래 나무. 한 개의 꽃송이를 피우는 나무의 뜻이 궁금하다. ⓒ 정민숙


따뜻한 집안을 나서자마자 찬바람이 휑하고 뼛속을 파고든다. 골목으로 나서니 소리까지 우렁차게 바람이 분다. 오전 10시가 넘었는데 지하철에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등산을 다닌지 이제 3년. 체력도 좋아지고 무엇보다도 무릎이 많이 아프지 않아 자리보기를 돌같이 할 수 있다. 8-4칸에 타면 제일 마지막 칸이라 벽에 기대서서 리처드 세넷의 <장인>을 꺼내 읽고 갈 수 있다. 사십대 후반에 만나는 리처드 세넷은 정말 좋다. <장인> 다음에는 <투게더>가 기다리고 있다. <투게더> 역시 리처드 세넷이 지은 책이다. 읽고 싶은 책이 나를 기다리니 '지루함'이 곁에 오지 않는다.

나이가 지긋한 학자들이 열심히 책을 써서 남기고 있다. 그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것이 아쉽지만, 그러나 인종과 국가를 떠나서 훌륭한 어르신이 후세들에게 자신의 많은 경험과 학식을 바탕으로 지혜를 선물하고 있다. 열심히 읽을 일이다.

언니네 집에 도착해서 보니 김장김치 맛 좀 보여준다며 가져간다고 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런데 블루베리만 들고 갔다. '으하하' 계면쩍게 한 번 웃고, 요즘 그런 나이라고 이해하라고 한다. 막상 언니네 집에 도착하니 너무 춥고 바람이 많이 불어 집에서 나올 때와 마음이 달라졌다. 북한산은 가기 힘들 것 같고 하니 차담이나 나누자고 했다가 12시 정도 되니 비가 그치고 하늘이 조금 개었다. 2시간 족두리봉 코스를 다녀오기로 했다.

a 솔밭 향림담으로 가는 길. 멀리 나무들 사이로 솔밭 풍경이 보인다. 산 속 유일한 평지인 솔밭.

솔밭 향림담으로 가는 길. 멀리 나무들 사이로 솔밭 풍경이 보인다. 산 속 유일한 평지인 솔밭. ⓒ 정민숙


06번 마을버스를 타러 가는데, 가로수 나무들이 바람에 죄다 꺾이고 부러져서 바닥에 가득 널렸다. 연신내 연서시장 맞은편에서 06번 버스를 타고 불광중학교를 지나 종점에서 내렸다. 조금 걸어 올라가면 불광사가 있다. 불광사 옆 북한산 들어가는 입구를 지나가자마자 산으로 올라가서 족두리봉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그 길 중간 바위에서는 다람쥐가 가끔 인사를 했는데 지금은 추워서 겨울잠 자러 들어갔는지도 모르겠다. 길은 은근 험해서 정신 차리고 올라가야 한다. 바람이 얼마나 센지 등산로에 나뭇가지들과 나뭇잎들이 가득 쌓여있다. 팥배나무 열매가 장판 무늬처럼 땅 바닥 위에 널려있었다.

바위를 한참 오른 후에 편안한 길이 나왔는데,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모자를 쓰고 앙상한 진달래꽃나무(철쭉인지도 모르겠다) 곁을 지나가는데, 언니가 꽃 좀 보라고 한다. 해마다 11월에 꼭 꽃을 피운다고 하던 그 꽃나무라고 한다. 꽃봉오리 하나가 추위와 바람과 비를 이기면서 야무지게도 맺혀있다. 봄과 초겨울. 일 년에 두 번 꽃을 피운다고 한다. 한겨울 매화도 아닌 것이 왜 이 때 꽃을 피울까? 나름 의지를 가지고 해마다 거르지 않고 그렇다고 하니, 지구의 이상기온에 대처하는 그의 뜻이라고 생각하며 박수 한 번 보내고 지나간다.


a 향림담 솔밭 외부 북한산 중턱에 있는 솔밭. 평지에 소나무가 늘어서 있는 모습

향림담 솔밭 외부 북한산 중턱에 있는 솔밭. 평지에 소나무가 늘어서 있는 모습 ⓒ 정민숙


족두리봉을 지나 비봉 가는 길에 오를 때까지 조용조용 걸으니, 몸이 적당하게 덥혀져서 따뜻해졌다. 먼지가 씻겨 나간 공기는 온 몸 안으로 들어와 한 바퀴 몸속을 순환하는 것 같다. 땀이 나지 않으니 쾌적한 기분으로 움직일 수 있어 좋다. 오후에 일이 있어 산 속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없으니 하산 할 때까지 한 번만 쉬기로 했다. 비봉 가는 길에서 향림담으로 내려가는 길 가기 직전에 있는, 작은 소나무 밑에 자리를 깔고 앉아 따뜻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언니가 타주는 커피는 진짜 맛있다.

커피 잔을 두 손으로 감싸 따뜻한 온기를 느껴가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누런 백구 한 마리가 어디선가 나타나 애처로운 눈빛으로 언니와 나를 번갈아 본다. 이 개는 벌써 이 코스에서 몇 번이나 마주쳤던 개다. 배가 고픈가 보다. 우린 먹을 것을 가져가지 않았기 때문에 줄 게 없었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조용히 일어나서 자리를 정리하고 걸음을 옮겼다. 백구는 참 정중하게 약간 거리를 둔 상태로 우리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이다가 조용히 자기 갈 길로 가 버렸다. 불쌍하다.


a 향림담 솔밭 내부 인적 없는 솔밭. 향기가 그윽하다.

향림담 솔밭 내부 인적 없는 솔밭. 향기가 그윽하다. ⓒ 정민숙


참 똑똑하고 괜찮아 보이는 놈. 누가 버렸을까? 어쩌다 북한산 꼭대기를 배회하는 유기견이 되었을까? 언니는 '마당이 있으면 데려가 키웠으면 좋겠네'라고 한마디 한다. 친정엄마는 입양하지 않으면 안락사 당한다고 했던 유기 고양이를 두 마리나 키우고 있다. 엄마랑 살고 있는 고양이는 그 전에 키우고 있던 고양이 '가을이'까지 세 마리나 된다. 워낙 부지런한 엄마 덕분에 집안의 청결과 고양이들의 건강을 유지하며 살고 있지만, 나는 개나 고양이 키울 엄두도 내지 못한다.

하지만 멋진 신사 같은 그 개가 굶주림을 참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살짝 두렵고 무서워진다. 더구나 요즘 읽은 소설이 정유정의 장편소설 <28>이라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개가 사람을 공격할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 제발 그런 일이 없기를... 이 추운 날, 산에서 지내는 고양이와 개들. 북한산 생태계 파괴도 바라지 않지만, 그들이 갑자기 몰살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산길을 지나가는 등산객에겐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참 답답하고 딱한 이 상황을 만들어 놓은 인간들은 책임 없이 어딘가에서 살고 있겠지.

a 바람에 쓰러진 나무 쓰러졌지만 물을 머금어 무게가 상당히 나갔다.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

바람에 쓰러진 나무 쓰러졌지만 물을 머금어 무게가 상당히 나갔다.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 ⓒ 정민숙


책임질 수 없는 생각들은 떨쳐버리라는 듯이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가 파도소리처럼 울려 퍼진다. 그 소리는 아름다운 합창 소리 같다. 숲길을 헤쳐 나오면 사방이 뻥 뚫린 바위가 나온다. 나는 그 곳이 언제나 좋다. 진경산수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바위와 소나무가 어울리는 그 풍경은 아무리 봐도 진경산수화다. 정선도 김홍도도 북한산에 몇 번이나 올라와서 지금 우리가 지나가는 이 길을 걸었을 것만 같다.

a 향림담의 낙엽이불 낙엽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정겹다. 자주 보는 향림담. 친구 같다.

향림담의 낙엽이불 낙엽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정겹다. 자주 보는 향림담. 친구 같다. ⓒ 정민숙


저 멀리 솔밭이 보인다. 주변 나무들이 모두 앙상한 가지들만 남겨둬서 숲속을 엑스레이 촬영을 한 것처럼 훤히 보인다. 멋지다. 내가 화가라면 화첩을 꺼내들고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대신에 카메라를 꺼내서 사진을 찍었다. 향림담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솔밭. 참 기분 좋은 솔밭. 비가 온 직후라 그런지 소나무에서 나온 솔향이 그윽하게 풍긴다. 떨어진 솔잎이 융단처럼 깔린 그 길을 둘이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지나갔다. 가는 길. 나무 한 그루가 넘어져있다.

a 향림담 근처 산 속의 팥배나무 열매 팥배나무 열매의 붉은 색이 단풍처럼 보인다. 사진으로는 표현되지 않는 팥배나무 열매의 아름다움

향림담 근처 산 속의 팥배나무 열매 팥배나무 열매의 붉은 색이 단풍처럼 보인다. 사진으로는 표현되지 않는 팥배나무 열매의 아름다움 ⓒ 정민숙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언니가 지나갈 수 있도록 해 주려고 했는데, 가느다란 그 나무가 어찌나 무겁던지 꼼짝도 하지 않아서 치울 수가 없었다. 뿌리가 견디지 못했는지 통째로 넘어가 버렸다. 세게 부는 바람에 다른 나무들은 가지 끝만 부러지고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데, 이 나무는 뿌리가 뽑혀버렸으니, 견디고 버틴다는 것이 참 오묘한 일이다.

a 소금 같은 우박 갑자기 후두둑 쏟아진 우박. 장갑 위의 하얀 것들이 우박이다.

소금 같은 우박 갑자기 후두둑 쏟아진 우박. 장갑 위의 하얀 것들이 우박이다. ⓒ 정민숙


향림담 위로 오니 숲이 마치 단풍 든 것처럼 붉다. 팥배나무가 열매를 가득 매달고 있어서 그 색이 물감을 흩뿌려 놓은 것 같다. 여름이면 사람들이 발을 담그고, 근처에서 점심을 먹기도 했는데, 그 연못위로 낙엽이불이 가득 펼쳐져 있다. 장소는 매 한 곳인데 사철 다른 모습들이 펼쳐지니 북한산은 매번 다른 연인 같다. 자연의 변화를 온 몸으로 펼쳐 보여주니 아무리 우매하더라도 그 변화를 알아챌 수밖에 없다.

a 붉은 꼬마 전구 같은 팥배나무 열매 색 고운 열매

붉은 꼬마 전구 같은 팥배나무 열매 색 고운 열매 ⓒ 정민숙


향림담 주변 풍경을 잠시 서서 감상 중인데 후두두둑 소금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며 무엇인가가 쏟아진다. 우박이다. 내 손 위의 우박은 금세 체온에 녹아 없어지는데, 연륜이 느껴지는 언니 검은 장갑 위의 우박은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하루 동안 볼 수 있는 날씨치고는 변화무쌍하다. 우박은 또 바로 그치고 바람도 잦아들더니 맑은 날씨가 되었다. 길 위에 붉은색 팥배나무 열매가 꽃잎처럼 떨어져 있다. 길옆에 떨어지지 않은 열매들은 마치 올망졸망 붉은 전등을 켜 놓은 것처럼 나무에 매달려있다.

입산해서 하산까지 두 시간 정도의 시간. 비오고 바람 부는 날 왜 산에 가냐고 언니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그런 날, 안전한 길로 다니면 위험하지 않고, 그런 날에만 볼 수 있는 풍경들이 있다고 했다. 말로 설명해서는 알 수 없는 것들. 이제 그 말뜻이 무슨 의민지 알겠다. 말로는 통할 수 없는 그것. 같은 경험을 해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것들. 그것을 경험하고 나면 여러 가지 말이 필요 없다. 내가 등산하고 싶은 날, 의지만 있다면 핑계대지 않고 산에서 만나 두세 시간 머무르다 오면 되니까.

a 작은 등불 같은 열매 사람이 먹을 수 없어 그 존재를 보존하는 팥배나무 열매. 사람 손 타지 말고 산의 주인으로 살아가길.

작은 등불 같은 열매 사람이 먹을 수 없어 그 존재를 보존하는 팥배나무 열매. 사람 손 타지 말고 산의 주인으로 살아가길. ⓒ 정민숙


설명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것. 그 의미를 알게 되기까지 삼 년 걸렸다. 비바람 속에서 꽃을 피우는 나무, 사람은 아니지만 염치를 알고 조심히 먹을 것을 청하는 견공, 외부와 내부가 모두 아름다운 솔밭의 향기, 바람에 쓰러졌지만 내가 들어 올리는 것은 허락하지 않은 나무... 겸손을 배우며 내려오는 길에 뿌려진 팥배나무 열매. 이 풍경들이 바로 북한산의 11월 모습이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북한산의 11월 모습.
#북한산 #북한산 11월의 진달래 #향림담 #북한산 유기견 #북한산 팥배나무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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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위생사 . 구강건강교육 하는 치과위생사. 이웃들 이야기와 아이들 학교 교육, 책, 영화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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