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춘 신임 대통령 비서실장이 지난해 8월 8일 청와대에서 열린 비서실장 및 수석비서관 임명장 수여식에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고개숙여 인사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더 흥미로운 사실은 <대한뉴스> 제965호의 제작일은 긴급조치 발표일보다 사흘 앞선 1월 5일이라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드라마도 아닌데 긴급조치 선포라는 사건뉴스를 '선제작 후보도'한 셈입니다. 그런데 이 '선제작 뉴스'에도 "유언비어 날조·유포 행위를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처단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는 박정희 정권이 74년 1월부터 16개월 동안 유언비어를 심판·처단했지만 근절이 안되어, 결국 '유언비어 금지'를 첫 항에 내세운 긴급조치 9호를 발령하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긴급조치 9호로 유언비어가 금지되어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가 이뤄졌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도자 박정희가 죽었지만 이 나라는 아무런 흔들림 없이 생업에 종사한 국민들에 의해 더 발전한 것이 그 증거입니다. 유언비어 금지의 명분은 '국가 안보'였지만 실제로는 '정권 안보'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도 중국 같은 일당 독재국가나 북한 같은 일인 독재국가에서는 유언비어를 심판·처벌합니다. 3일에도 중국 공안부장이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인터넷 유언비어와 인터넷 사기행위 활동을 엄단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유언비어든 사실이든 정보가 빛보다 빠른 속도로 빠르게 전파되는 세상에 이런 통제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요? 당장 SNS에선 누리꾼들이 박통의 '유언비어 단속' 발언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태도를 비교해 풍자한 장면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또 누리꾼들은 '아버지 박통'이 유언비어를 금지한 긴급조치 9호의 내용을 담은 <조선일보> 1면 사진을 퍼나르고 있습니다.
'짐이 곧 국가'인 절대왕정 시절의 유언비어이런 식의 통제는 '왕의 절대적 권력은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왕권신수설을 기반으로 '짐이 곧 국가'인 시절에나 통용된 방식입니다. 아니, 절대왕정 시절에도 유언비어는 넘쳐흘렀습니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 루이16세(1774~1792)의 아내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혁명 전에 국민들이 빵이 없어 굶주리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선 했다는 이 말은 지금도 오스트리아 공주 출신인 앙투아네트의 세상 물정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이 말을 한 사람은 루이 14세(1643~1715)의 아내인 스페인 왕가 출신의 마리아 테레사 왕비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외국인이라는 점입니다. '빵 대신 케이크'는 자연 재해와 식료품 가격 폭등, 국가재정 파탄으로 사회 불안과 불만이 고조된 가운데 프랑스 국민의 외국인 경멸의식이 앙투아네트에게 투사된 악성 유언비어 중 하나였습니다. 실제로 파리 교외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세상물정 모르고 귀족들과 파티를 즐긴 왕과 왕비를 파리로 데려와 궁에 유폐시킨 '여자들의 행진'(1789년) 사건의 발단은 파리의 빵 공급 부족이었습니다. 빵이 부족해 악의적인 유언비어들이 양산된 것입니다.
이처럼 프랑스 혁명의 한 배경은 루이16세의 실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원인(遠因)은 왕권신수설 신봉자이자 '짐이 곧 국가'라고 선언한 루이14세의 절대왕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루이14세는 주변국을 침략해 프랑스 영토를 넓히고 그 부를 바탕으로 베르사유 궁전을 지어 왕궁을 옮긴 유럽에서 가장 강한 왕이었지만, 서민 생활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비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당시 파리는 거지와 쥐 그리고 유언비어가 들끓었고, 프랑스인의 평균 수명은 25살이 안되었습니다. 혁명의 싹은 이때부터 움터 백년 후에 꽃을 피운 셈입니다.
루이14세는 '태양왕'이라 불리며 72년 동안 절대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프랑스 국민은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려 온 해방을 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크게 기뻐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세계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절대왕정 시절에도 유언비어는 단속하고 처벌한다고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아버지 박통'이 통치하고, 그 딸이 '유신공주'로 살았던 긴급조치 시대는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유신 회귀를 걱정하거나 그에 버금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고요? 박통 주변과 새누리당에는 김기춘 시종장 말고도 시대착오적인 군상들이 즐비하기 때문입니다.
국민은 박수칠 준비가 돼 있다최근 서상기 의원은 불법감청에 대한 방지대책도 준비되지 않은 가운데 국정원의 휴대폰 감청을 쉽게 하자는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을 새누리당 동료의원 13명과 함께 발의했습니다. 국회 정보위원장인 서 의원은 야당이 국정원 댓글 사건을 국기문란 사건이라며 정보위 소집을 요구하자 '무게로 따지면 깃털' 사건이라며 소집을 거부했던 장본인입니다.
같은 당의 김진태 의원은 한술 더 떠 국가 안전에 중대한 위해를 초래할 우려가 있는 피의자에게 변호인의 접견·교통권을 제한하는 것을 골자로 한 형사소송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검사 출신인 김 의원은 11월 박통의 유럽 순방에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동행하면서 "파리 시위자들에게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할 것"이라고 재외국민을 협박했던 장본인입니다. 두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게 되면 사실상 긴급조치 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지금이 마리 앙투아네트 시절과 보릿고개가 있던 '아버지 박통' 시절처럼 빵이 부족한 시대는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빵으로만 살 수는 없습니다. 1789년 8월 26일 프랑스 제헌 국민의회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발표해 이렇게 선언합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간다. 모든 주권의 근거는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다."이를 계기로 사람들은 검열받지 않은 신문을 볼 수 있게 되고, 정치단체를 만들어 자기 의견을 피력할 수 있게 됩니다. 서상기-김진태 법안은 225년 전에 프랑스 민중이 피 흘리며 쟁취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무색하게 합니다. 제 말에 공감이 안 된다면, 현재 800만명이 본 영화 <변호인>을 한 번 보십시오. '짐'이 아닌 국민의 눈높이로 소통하는, 그런 대통령이라면 국민은 박수칠 준비가 돼 있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12
공유하기
'말이 안통하네뜨', 영화 <변호인>부터 보시라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