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장에서 선물로 받은 그림(왼쪽이 평양의 첫째 수양딸 설경이 그리고 오른쪽이 나)
신은미
한국에서 강연을 할 때마다 여지없이 찾아 오시는 분들이 계시다. 바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살이를 하신 분들이다. 내가 처음 이분들을 만났을 때 나는 '왜 이분들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할까' 의아해했다. "혹시 이분들은 진짜 '빨갱이'들이고, 북한을 들락날락하는 내게 '동지애'를 느껴서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걸까"라고 말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분들은 공산주의나 북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중 한 분은 대표적인 조작사건 중 하나인 '아람회' 사건으로 온갖 고초를 겪으신 분이다. 그분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1980년 5월 봄이었어요. 성당에서 봄 야외 미사로 인근 무주에 갔었습니다. 일종의 봄 소풍인 셈이죠. 미사 중 강론 시간에 본당 신부님께서 친구 신부님 한 분을 소개하시더군요. 전주에서 오신 신부님이었습니다. 전주 신부님께서 마이크를 잡으시고는 '제가 광주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엄청난 사실을 목격하고 왔습니다'라고 하시며 당시 광주항쟁 목격담을 말씀하셨어요.야외 미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한 뒤 성당 모임에 일찍 갔었습니다. 회합실 탁자 위에 놓인 두툼한 성경책을 별 뜻 없이 펼쳐보니 8절지 크기 등사 유인물이 있더군요. 서두에 '전두환 광주 살육작전'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낮에 전주 신부님으로부터 들었던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몸을 부들부들 떨며 본능적으로 유인물을 주머니에 넣고서 회합도 참석치 않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유인물 맨 마지막에 적힌, '이 유인물을 주우신 분은 신문이나 방송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있으니 주변에 알려 달라'는 간절한 글귀를 모른 채 지워 버릴 수가 없었던 거죠. 그래서 400여 장을 새로 인쇄해 동창(후일 고문 조작된 '아람회원')들과 당시 계엄하의 삼엄함을 뚫고 서울·대전 등 여러 지역의 지인들과 시민들에게 암암리 배포하게 됐던 겁니다.이 일과 함께 그로부터 약 1년 뒤 1981년 5월 친구 김난수(당시 육군대위)의 딸 아람이의 백일잔치에 모였던 것을 꼬투리 잡아 국가보안법 위반을 일삼은 '아람회'가 고문 조작에 의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소위 반국가단체 및 이적단체가 된 것이죠. 공안당국은 저희를 국가보안법으로 처벌을 하려고 저희를 북한과 연계시켰어요. 심지어는 온갖 고문을 가하며 북한 노래를 불러보라는 거예요. 근데 제가 북한 노래를 알 턱이 있습니까?""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불렀지요, 뭐.""아시는 북한 노래가 있으셨어요?""제가 북한노래를 어떻게 압니까. 하도 고문을 못 견뎌 그냥 만들어 불렀지요. '압록강아~ 두만강아~' 하면서 말이에요.""아니, 즉흥적으로 작사 작곡을 해서 불렀단 말씀이세요?""네….""재판정에서 판사님께 말씀드리시지 그랬어요.""그러고 싶어도 재판정 뒤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수사관들을 보면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답니다. 진실을 말했다가 또 지하실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건 아닌지 무서웠어요. 참으로 절망적이었지요. 판사님께서 '고문 때문에 허위자백을 하지 않았느냐'라고 물어봐 줬으면 좋겠다고 바랐지만, 어느 판사님도 묻지 않으시더군요. 하기야 그렇게 물었어도 '그렇지 않다'고 답했을 거예요. 무슨 배짱으로 '그렇다'고 말하겠습니까. 고문으로 인해 돌아가신 분도 계십니다. 당시 재판관님들이 후일 모두 대통령 후보로 나선 분들이랍니다. 이 모든 것이 분단 때문입니다. 분단이 해결되지 않으면 이런 일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될 겁니다. 신 선생님께서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남과 북을 오가는 모습이 무척 고마워 이렇게 선생님의 강연을 들으러 왔습니다."또 다른 슬픈 사연2013년 7월, 내 여행기의 독자라는 분으로부터 편지와 함께 그분이 쓰신 수필집이 배달됐다. 제목은 <한과 슬픔은 세월의 두께만큼>. 그리고 작은 글씨로 '강화 민간인 학살의 진실과 과거사법 투쟁사'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그분은 시인이자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족회 일을 맡고 있다. 책의 첫 장을 넘기는 순간, '이 책에는 이분이 살아온 이야기가 담겨 있겠구나'라는 느낌이 왔다. 책에는 우리 민족의 잔인한 비극이 실려 있었다.
해방 후 강화도에서 공립학교 교장으로, 장학사로 계셨던 자상하신 아버지, 부지런하고 선한 성품으로 정성스레 6남매를 돌보시던 어머니, 열네 살이였던 언니와 네 명의 동생들, 그리고 당시 열두 살이었던 이분은 부모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한 날들을 보냈단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행복한 삶은 1950년 한국전쟁 중 아버지가 어디론가 떠나면서 산산조각 나버렸다.
어느 날, 치안대가 한살배기 남동생을 등에 업고 마당에 앉아 빨래를 하고 있던 엄마를 끌고 갔다고 한다. 얼마 뒤, 어린 동생을 등에 업은 엄마가 여러 사람들 사이에 끼어 어디론가 끌려가는 모습을 봤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것이 당시 열두 살이었던 이분이 전해 들은 엄마·동생의 마지막 소식이었다. 엄마와 동생이 학살 당한 것이다. 그 뒤 이 소식을 접한 할머니가 울며불며 어린 손주들을 돌보기 위해 집에 오셨지만 치안대는 할머니마저 끌고가 학살했다.
곳곳에 냉혈하리 만큼 차가운 시선들 그리고 '빨갱이 가족'이라는 무시무시한 족쇄가 이들 어린 남매를 피멍 들게 했다. 그 힘겨움의 무게에 짓밟힌 이분의 순하고 착한 두 동생들은 병으로 일찍이 세상을 등지게 됐다. 이런 비극 속에는 이들과 함께 동시대를 걸어온 냉소적인 이웃 사람들, 사회, 국가가 있었다. 바로 우리의 야만적인 '무지'가, 우리의 잔인한 '무관심'이 이들의 삶을 파멸시킨 것이다.
이분의 이야기는 비단 억울하게 돌아가신 그분의 어머니와 한살배기 동생 그리고 할머니의 원한 맺힌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 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탯줄처럼 연결된, 서글픈 우리 민족의 삶 그 자체를 송두리째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서슬 퍼런 원한과 절망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슬픔과 그리움이 이분의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뿐만 아니라 용서를 통한 힘겨운 치유의 고통도 절절히 느껴진다.
이분 또한 모든 비극의 근원이 분단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면 이런 일은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국가보안법과 나의 외할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