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고요?

[포토에세이 동네한바퀴] 고복자연공원길 생각하며 걷기

등록 2014.05.28 11:26수정 2014.05.28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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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도불행(非道不行),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공자의 <효경(孝經)>에 나오는 말이죠. 하지만 '길이 없으면 내면서 가라'는 말도 있습니다. 어차피 그 어떤 길도 처음부터 길이었던 것은 아니잖아요. 한 사람이 발자국을 내고 그 위를 다른 발자국이 걷고, 그렇게 길은 만들어지죠.


몇 년 전만 해도 여기에 이런 길이 나리라곤 상상도 못했답니다. 세종특별자치시가 되면서 입는 혜택인지는 몰라도 세종시 연서면 고복리와 용암리에 걸쳐 자리한 고복저수지 주변으로 공원길이 났습니다. 내가 사는 동네입니다. 아마도 저수지를 한 바퀴 돌리는 둘레길을 놓으려는 것 같습니다. 아직 공사가 완공되지 않았지만 지금도 나와 아내가 함께 걷는 속도로 왕복 40분은 족히 걸립니다.

길 아닌 곳에 길을 낸 이, 감사합니다

 고복자연공원 안내표지판이 수자원공사에 의해 세워져 있습니다.
고복자연공원 안내표지판이 수자원공사에 의해 세워져 있습니다.김학현

 세종시 연서면 고복리와 용암리에 걸쳐 자리한 고복저수지 주변으로 공원길이 났습니다. 길은 꽤 운치 있게 출발합니다.
세종시 연서면 고복리와 용암리에 걸쳐 자리한 고복저수지 주변으로 공원길이 났습니다. 길은 꽤 운치 있게 출발합니다.김학현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는 옛 성현의 말을 깡그리 무시한 채 길 낼 곳이 아닌 곳에 길을 낸 공원길을 걸으며 '길이 없으면 내면서 가라'는 외침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더 좋은 것은 내가 내면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이미 친절하게도 멋지게, 탄탄하게, 물에 빠지지 않도록 난간까지 만들어 놓은 길을 걷고 있습니다. 참 감사합니다.

성공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에 물려 사는 이 세대에게는 '비도불행(非道不行)'은 패배자의 외침이겠지요. 새마을운동 노래를 들으며 아침에 잠에서 깨고, '우리도 잘살아 보자'는 외침이 휘감는 마을에서 자라났고, 국민교육헌장을 앵무새처럼 외우며 큰 나로선, 이런 말하면 안 어울린다는 거 압니다. 그러나 그간의 경제성장이 올바른 성장이었는지 말해야 하는 당위성 앞에 서게 됩니다.

없는 길을 닦는 게 성장이 아니라고, 경제가 성장했다고 잘사는 게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새로 난데없이 생긴 길 위에서 뭐 하는 거지요? 참 묘합니다. 새로 낸 길 위를 걸으며 '비도불행(非道不行)'을 이야기하다니요. 당위성은 곧 비굴함이 됩니다. 길 위에서 난 인간의 교묘한 이중성을 발견하게 되네요. 이렇게 인간은 겉과 속이 다른, 추스르기 힘든 삶을 엮어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미 내놓은 길은 왜 이리도 편한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인부들) 이 길을 내느라 얼마나 땀을 흘렸을까요? 그 길을 이렇게 쉽게 걷는 난 누굴까요? 우린 이렇게 누군가에 의지하고 기대고 살면서도 감사보다는 불평을 하죠. 참 감사합니다. 그 누군가에게. 길 아닌 곳에 길을 낸 내 앞의 그 누군가에게.

그가 수고했기에 곧은길을 갑니다. 그가 수고했기에 운치 있는 길을 걷습니다. 그가 수고해 주었기에 산들바람 일렁이는 호숫가를 돕니다. 그가 없었다면 길이 없습니다. 길이 없다면 나도 이 길 위에 없습니다. 그가 알든 모르든 난 그가 먼저 내민 손을 잡고 있는 거지요. 그 손이 마냥 따스하기만 한 건 아마도 따사로운 물빛, 싱그러운 바람소리, 푸른 나뭇잎들의 노래, 나뭇가지 사이로 조로록조로록 넘나드는 새들의 군무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안전하게 만든 이, 감사합니다

 고복자연공원길은 '길이 없으면 내면서 가라'고 외치는 듯합니다.
고복자연공원길은 '길이 없으면 내면서 가라'고 외치는 듯합니다.김학현

 고복자연공원길은 저수지 가로 난 길이기에 수상안전을 위한 도구들이 가지런히 갖춰져 있습니다.
고복자연공원길은 저수지 가로 난 길이기에 수상안전을 위한 도구들이 가지런히 갖춰져 있습니다.김학현

산뜻하게 단장된 저수지 주변, 때론 물위를 걷다가 때론 땅위를 걷다가 그렇게 사람을 돌아가게 만듭니다. 저수지의 생김새를 따라 사람이 돌아가는 형국입니다. 아무리 돌아가게 만들어도, 이 길 걷다가 세상사 돌아가는 꼬락서니 한탄하진 말자 다짐하며 걷습니다. 세상이 돌고 있다고 나도 돌지는 말자 다짐하며 걷습니다. 굽은 길이 한없이 나를 돌린다 해도 난 여전히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기에.

왜 그렇잖아요. 배로 가는 길도, 버스로 가는 길도, 지하철로 가는 길도, 비행기로 가는 길도, 뭐 하나 안전하고 평화로운 게 있던가요?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가라앉더니, 지하철이 사고를 칩니다. 버스는 안전하려나 했더니 터미널이 불탑니다. 아, 이 나라에서 안전한 길이 있던가요?

그런데 난 오늘도 안전한 길을 걷습니다. 참 감사한 일이죠.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길 위를 걸으며 마냥 감사한 마음입니다. 혹시나 실수하여 저수지에 빠진다 해도 건져 올릴 도구들도 비치되어 있습니다. 구명조끼며 구명 튜브가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드문드문 거리를 두고 말입니다. 실은 난간이 성글어서 어린아이들은 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내가 낸 길이 아니라 누가 내준 길을 걷다니, 이게 무슨 꿈같은 상황입니까. 둘레길이 아니라 만약 인생길이 그렇다면 얼마나 신나는 일일까요? 뭐, 하긴 그렇게 인생길을 쉽게 걷는 이들도 있습니다. 태어나 보니 아버지가 회장님이라네요. 그도 회장님이 되었어요. 태어나 보니 미국인이 부모라네요. 그도 미합중국 시민권자입니다. 하하하. 이렇게 인생이 날로 먹기인 사람들도 있죠. 뭐, 그들 나름의 고민과 걱정이 없는 건 아니겠지만요.

걸으며 생각하게 한 이, 감사합니다

 길 옆구리 사이사이로 가로등이 보입니다. 가로등이 길바닥에 붙어 있어요.
길 옆구리 사이사이로 가로등이 보입니다. 가로등이 길바닥에 붙어 있어요.김학현

 고복자연공원길에는 잠시 쉬었다 가라고 벤치가 놓여 있습니다.
고복자연공원길에는 잠시 쉬었다 가라고 벤치가 놓여 있습니다.김학현

밤에는 걷지 않아 모르는데, 길 옆구리 사이사이로 가로등이 보입니다. 가로등이 길바닥에 붙어 있어요. 아무래도 가로등 불빛만으로도 꽤 운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복자연공원길이 이렇게 밤에도 와보라고 우릴 부르네요. 언제 시간 내 밤에 와 아내와 손잡고 걸으리라 마음 다져봅니다.

길이 나를 웃게 합니다. 길이 나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길이 마냥 즐거운 마음으로 앞을 보라 말합니다. 길이 잠깐은 쉬는 것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길이 말을 겁니다. 길이 대답도 합니다. 길이 올라가게도 내려가게도 합니다. 길이 들어서게도 나가게도 만듭니다.

길이 나를 돌아가게 만듭니다. 돌아가지만 돌지는 말자 각오하게 합니다. 길이 새삼스럽게 나의 이중성을 깨웁니다. '비도불행(非道不行)'이 맞지만, 낸 길은 감사하며 가자고요. 길이 버럭버럭 발밑에서 삶이 버겁다고 합니다. 발을 옮길 때마다 삐걱삐걱 울거든요. 그 길 위에 어느 몰지각한 인생이 거느린 반려견의 배설물이 자기 영역표시를 합니다. 나도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삐걱거리며 영역표시를 하고 있습니다.

때론 한 바퀴 물위를 돌아가기도 합니다. 때론 꾸부정 돌아누운 길을 툭툭 치며 걷기도 합니다. 솔가지를 코에 당기어 솔냄새를 맡아 보기도 합니다. 잠시 멈추고 벤치에 안기도 합니다. 아내의 손을 잡아보기도 합니다. 잘 익은 버찌를 따 입에 넣어보기도 합니다.

씽씽 거리며 자전거가 지나갑니다. '어? 자전거 길이 아닌데' 생각하며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오늘도 맨 처음 시작한 곳으로 돌아옵니다. 내일도 또 그렇게 누가 내놓은 이 길을 걷겠지요. 그러면서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자' 원론적인 인생의 독본을 꺼내놓겠지요. 길이 거기 있기에 걷는 걸까요? 내가 걷기에 길이 되는 걸까요?

 솔가지를 코에 당기어 솔냄새를 맡아 보기도 합니다.
솔가지를 코에 당기어 솔냄새를 맡아 보기도 합니다.김학현

 길은 때론 들어오게 만듭니다. 때론 나가게 만듭니다.
길은 때론 들어오게 만듭니다. 때론 나가게 만듭니다.김학현

덧붙이는 글 '대한민국' 하고도 '세종' 하고도 '특별' 하고도 '자치시'인 동네에 내가 산다는 게 무엇일까? 촘촘히 써봅니다.
#고복저수지 #고복자연공원 #세종특별자치시 #둘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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