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나십시오, 이 용사님."
"백전불패의 특급전사, 김 용장"
결코 게임 속 대사가 아니다. 의협심 넘치는 무협소설의 한 장면도 아니다. 2014년 말 대한민국 국군에서 벌어질 수도 있는 모습이다. 지난 14일 <한국일보>의 단독보도에 따르면, 민관군 병영문화혁신위원회는 병영문화 개선방안의 일환으로 현재 4단계로 구분되어 있는 사병 계급체계를 일원화하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1954년 36개월의 복무기간이 결정되면서 60년 동안 유지되어 온 '이등병-일병-상병-병장'의 사병 계급을 '용사(勇士)'로 통일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또한 알려진 계획에 따르면 전역을 얼마 남지 않은 우수 용사는 현재의 분대장 격인 '용장(勇將)'으로 선발되며, 최전방 비무장지대(DMZ)에서 근무하는 용사는 '전사(戰士)의 호칭을 부여받게 된다.
용장으로 선발되지 못한 일반 용사들은 하나의 계급으로 군 생활을 마쳐야 하는 셈이다. 이는 지난달 일병과 상병으로 계급을 이원화하고, 우수한 상병만을 병장으로 진급시키겠다고 밝힌 육군의 계획보다도 더욱 파격적인 방안이다.
병영문화 개선이 고작 '용사'라니
혁신위원회 관계자는 이러한 계급체계의 재편 방안에 대해 "병사 상호간의 명령 복종체계에 따른 병영사고 발생 소지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변화가 제2의 임 병장, 윤 일병 사태를 막을 수 있을까? 불행하게도 전혀 그렇지 않을 것 같다. <개그콘서트> 속의 한마디처럼 "아이고, 의미 없다!"나 마찬가지다.
병영 내 부조리를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목적은 물론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겉 포장지를 열심히 바꾼다고 해서 결코 그 안의 내용물이 변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군의 특수성은 계급의 상하관계에 입각한 명령체계에서 비롯되며, 이는 완전히 철폐하는 것이 어려운 영역이다.
무엇보다도 설령 징병제 하에서 계급을 일원화한다고 하더라도, 서열은 그대로 존재하기 마련이다. 때로는 능력과 경력에 따라, 또 때로는 개인의 힘에 따라 강자와 약자가 또다시 불합리하게 구분될 수 있다.
실제로 육군 9사단은 2년 전부터 기존의 계급체계를 간소화해, 같은 해에 전입한 병사는 모두 동기로 분류하는 제도를 시범 운영해왔다. 그 결과 2013년부터 올해까지 자살한 병사는 단 한 명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는 단지 육군 9사단만의 실적이다. 그렇다면 최근 경기 포천시의 육군 모 부대 내 동기생활관에서 벌어진 사병의 집단폭행과 성추행 사건은 무엇으로 해명할 수 있을 것인가?
대한민국 국군이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속의 엄석대처럼 그저 힘 센 사람이 모든 것을 평정하는 곳으로 변질될 것이라는 우려는 그래서 나온다. 아무리 계급체계를 바꾼들, 좁은 생활관으로 끌려온 젊은 청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알력 다툼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병영 내 부조리를 바라보는 작금의 처사는 그저 사병들의 개인적인 인성과 계급, 기수문화를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삼아버린 '눈 가리고 아웅'식의 대처밖에는 되지 못한다. 더욱 커다란 구조를 바라보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이러한 대책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저 기본에 충실하면 되기 때문이다. 처참하게 무너진 국군 내의 사법체계와 어긋난 병영문화를 다시금 정립하면 해결될 일이다. 계급의 고하와 든든한 '빽이나 라인'이 있는지에 따라 처벌의 유무와 경중이 달라지고, 사건이 터질 때마다 그저 쉬쉬하고 책임을 축소 및 전가하기에만 바쁜 오늘의 군법으로 개혁은 요원하다.
경직된 소통 창구는 물론, 내부고발자의 용기를 도리어 집단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는 오늘의 행태로 변화는 불가능하다. 구타를 비롯한 가혹행위에 대해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강력히 처벌해야 하며, 공정성을 기할 수 있도록 현재의 군사법원을 독립시켜야 한다.
또한 간부 및 사병 각각에 대해 더욱 철저한 사후관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기존 부대에서 성추행을 당해 전출 온 여군 부하가 전입부대의 사단장에게 또다시 추행 당하는 것이 오늘날 국군의 부끄러운 민낯이다. 그만큼 지속적인 관심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간부조차도 도통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지독한 상명하복 문화 아래서, 그저 '60만 분의1'로만 인식되는 사병들의 상황은 얼마나 더 심각할 것인가?
더욱 강화될 적자생존 논리... 무섭다
그렇기에 국군은 그 본모습을 바깥에 드러내야만 한다. 군의 핵심 전력이나 계획을 마구잡이로 노출시켜 버리자는 의미가 아니다. 곪고 있는 문제가 있다면, 근본적인 개혁을 위해 그것을 과감히 밝히고 함께 고민하자는 것이다. 이토록 오랫동안 국방부가 개혁을 부르짖었음에도 부조리 행태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라면, 때로는 제3자의 관점에서 이를 바라봐 온 민간에게도 손을 벌리자는 것이다.
오늘의 부조리는 더 이상 병영 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 소소한 것이 아니다. 1948년 건국과 함께 실시된 징병제, 북한과의 휴전 상황과 고착되어 버린 계급의 사다리, 그 속에서 등한시된 인권까지 이 사회의 전 영역이 망라된 문제다.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는 정치권부터 시민사회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달려들어 풀어야 한다.
물론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하는 것은 바로 군이다. 사법체계의 개혁과 함께 독립적인 군 옴부즈만 제도를 적극 도입하는 것이 대표적인 해법이 될 수 있다. 무릇 상처는 고통이 있더라도 환부를 헤집어야만 한다. 변두리에 약만 발라서는 결코 낫지 않는 법이다.
육군 모 부대의 신병교육대에서 조교로 21개월을 보냈다. 그동안 2천여 명의 훈련병들이 이곳을 거쳐 각자의 자대로 떠났다. 8주 간 이루어지는 짧은 훈련과정이었음에도 훈련병이 훈련병을 때리고 따돌리며, 성추행하는 가혹행위는 매 기수마다 꾸준히 벌어졌다.
미처 사회의 때를 벗겨내지 못한 훈련병들에게도 힘의 논리에 따른 먹이사슬이 존재하는 셈이다. 자대 전입 후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의 논리를 더욱 배양하게 될 이들에게, 계급이라는 최후의 마지노선마저 없애버린다면 어떤 풍경이 빚어질지 벌써부터 몸서리가 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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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용장'... 이러다 더 큰 사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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