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 운송할 수 없는 택배기사 "너무 억울하다"

[현장 취재] 이 운수노동자를 업무 배제시킨 건 유령인가?

등록 2015.10.28 14:08수정 2015.10.28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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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택배 운송 업무를 해오던 한 개인 사업자가 뚜렷한 이유 없이 5개월 가까이 해당 업무에서 완벽히 배제당하고 있다. 그런데, 그를 택배 운송에서 배제시킨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이건 유령이 한 일일까?

우정사업본부 우체국물류지원단으로부터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A씨가 전하는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우체국물류지원단은 우체국택배 업무를 진행하며, 자체에서 소화시키기 힘든 초과 택배물량을 위탁계약을 통해 고객들에게 배송한다.

경상북도 포항시에 거주하는 A씨는 우체국물류지원단 포항운송관리소와 업무 위탁계약을 맺은 B통운과 다시 재계약을 맺어 위탁된 우체국택배 물량을 특정 지역으로 운송하는 일을 1년6개월간 별다른 사고 없이 해왔다. 이것은 좋게 말하면 '위탁업무 계약'이지만, 현실적으론 수많은 노동관련 전문가들이 비판해온 '하청-재하청'의 악순환 고리다.

 "제가 뭘 잘못 했나요". 한국사회에선 을의 입장에 선 A씨의 아픈 심경에 공감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듯하다.
"제가 뭘 잘못 했나요". 한국사회에선 을의 입장에 선 A씨의 아픈 심경에 공감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듯하다.홍성식

택배운송 업무 중 불의의 사고... 보상은 위탁 계약업체에서

문제가 발생한 건 지난 5월 20일. 충남 계룡시로 운송을 나갔던 A씨는 택배물품을 하차하던 중 불의의 사고로 몸을 다쳤다. 다음날부터 정상적인 업무수행이 힘들었던 A씨는 '늑골 염좌 및 긴장'이란 진단을 받고 포항시 북구 장성동 시티병원에 8일간 입원했다.

입원해 있던 중 우체국물류지원단에 사고처리에 관해 문의한 A씨는 담당자의 답변에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우리와 위탁계약을 맺은 것이 아니다. 계약을 맺은 B통운과 상의하라'는 것.

결국 퇴원 이후 A씨는 B통운으로부터 치료비를 보상받았다. 이 과정에서 우체국물류지원단은 단 한마디의 위로도 전하지 않았다는 것이 A씨의 설명. 더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진 건 그 다음이다.


A씨는 퇴원을 한 5월 28일 이후 현재까지 5개월 가까운 기간 동안 단 한 건의 우체국택배 위탁운송도 하지 못하고 있다. 업무에서 완벽히 배제되고 있는 것이다.

"1년 6개월간 우체국택배 운송 위탁업무를 하면서 한 번도 실수나 지각을 한 적이 없는데 어째서 일을 주지 않는지 모르겠다"며 억울해하는 A씨. 그는 "내 이름과 차량 번호를 위탁업무 수행을 위해 우체국물류지원센터에 보내면 무조건 거부되고 있다"는 주장도 동시에 내놓았다.


사실관계 확인을 위해 포항우체국, 포항우편집중국, 우체국물류지원단 포항운송관리소와 통화를 했다. 세 곳에서 돌아온 대답은 대동소이했다. "우리 부서 업무가 아니니 관련부서에 문의하라" 또는, "배제된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다."

우정사업본부 담당 주무관 "책임이 없는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건 이상한 일"

지난 10월 23일 우정사업본부 위탁운송분야 담당 주무관에게 사실관계 확인을 부탁했다. 박상현 주무관이 10월 26일 내놓은 답변은 이랬다. "우체국물류지원단에 문의하니, A씨는 B통운과 계약한 분으로 확인된다. 그 후 일(업무 배제 등)에 관해선 알 수 없다"며 B통운 측에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법적 책임은 차치하고라도 인간적이고 도의적인 미안함은 느껴야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법적)책임이 없는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건 이상한 일 아닌가"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B통운과 관련된 취재는 박 주무관과의 통화 이전에 이미 마친 상태였다. B통운 관계자는 "A씨를 업무에서 배제하고 말고 할 권한이 우리에겐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고 말했다. 이에 관해선 A씨 역시 B통운 측과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우정사업본부 우체국물류지원단과 B통운 중 한쪽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된다.

법은 언제까지 가지지 못한 자의 심장을 겨눈 칼끝이 될지...

이 사건에 관해 박규환 노무사는 "업무 위탁과 치료비 보상 과정에서 우체국물류지원단의 불법이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면서도,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영세 개인사업자(운송노동자)의 딱한 형편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인권문제 전문가인 한동대 국제법률대학원 원재천 교수는 "사기업이 아닌 국가기관(우정사업본부)이라면, (위탁업무 개인사업자의)업무 수행 중 사고가 발생했을 때를 대비해 국제적 표준에 맞는 처리 시스템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며, "A씨의 경우 국가인권위원회나 국민권익위원회에 도움을 요청해도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에 더해 "업무의 효율성 추구가 인권에 우선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전했다.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약자의 인권을 부당하게 압박하는 이른바 '갑질'이 사회적 병폐로 지적된 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많은 수의 '갑'들은 법적 책임만 피해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은 '법은 언제나 가진 자에겐 모든 것을 막아주는 방패고, 가지지 못한 자들에겐 심장을 겨눈 칼끝'이라고 했다. 우정사업본부 우체국물류지원단과 A씨를 둘러싼 진실공방을 취재하며 이 문장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스튜어트 밀이 200년 전 지적한 바, '가진 자'가 휘두르던 유령의 칼날이 한국사회에선 여전히 '가지지 못한 자들'의 인권을 베어 피 흘리게 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에 게재된 것을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우정사업본부 #우체국택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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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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