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어촌 마을 풍경
강은경
"어디로 가려는 거야~?"내가 빽 소리를 질렀다. 필리핀 청년이 나를 힐끗 돌아봤다. 무표정한 눈빛으로. 그는 다시 바다에 떠 있는 방카(필리핀 전통 보트)를 향해 팔을 휘저었다. 이 남잔 왜 나를 배에 태우려는 거지? 설마, 납치?
팔라완 남부 끄트머리의 항구 도시 리오 투바(Rio Tuba). 나는 오늘 아침 푸에르토프린세사에서 로컬버스를 타고, 남부 끝에 있는 항구 도시인 이곳까지 곧장 내려왔다. 닭, 개, 짐 보따리, 승객들로 버스 지붕 위에까지 꽉꽉 들어찬 낡은 버스에 실려 장장 8시간 동안. 다리가 저려 쥐가 오르도록. (외국인 승객은 나뿐이었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일이람.
나는 무슨 똥배짱으로 혼자 여기까지 내려왔지? 무슬림 위험지역이라고 알려진 곳이라 여행자들의 발길이 뜸한 곳인데. 이지상 여행작가의 <언제나 여행처럼>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왜 우리는 이렇게 위험한 지역, 위험한 인생을 스스로 택하는 걸까? 만용 때문일까? 남에게 잘난 체하고 싶어서일까? 물론, 유치한 소영웅심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험심은 우리 속에 깃든 본능이다. 그것은 더 큰 자아를 찾고자 하는 성스러운 충동이며 통과의례이다.' 그랬다. 모험심, 만용, 그리고 호기심까지, 이 여행을 감행하도록 나를 부추겼을 게다. 게다가 나는 이 여행 중에 결코 불행한 변고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미신 같은 믿음도 까닭 없이 강했다.
내 가방을 메고 나를 배에 태우려는 낯선 남자 어쨌든 머리 가죽을 태워버릴 듯이 뜨거운 열대 오후의 햇살 속에서, 뭔가 잘못 돼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거였다. 한기처럼 엄습해오는 두려움에 질려 덜덜덜 떨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선 온통 납치, 살인, 강도, 몸값, 무슬림, 반군... 같은 단어들이 날뛰었다. 수상가옥촌의 끄트머리인 나무판자길 위에 위태롭게 서서.
"당신, 누구야! 이봇이야? 빙빙이야?"
나는 다시 악을 쓰듯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청년은 영어를 한 마디도 못 알아듣는지 아니, 못 알아듣는 척 하는 건지, '예스, 노'처럼 간단한 대답조차 주지 않았다. 방카를 향해 바쁘게 팔을 휘저을 뿐. 나는 계속해서 '너 누구야? 날 어디로 데려 가려는 거야?' 비명을 지르듯 악을 써댔다. 그대로 당장 도망치고 싶었지만, 내 배낭이 그 키 큰 청년의 등에 단단히 메어 있었다.
내 비명 소리를 들었는지 수상가옥에서 주민 서너 명이 몰려나왔다. 나는 간절한 눈빛으로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영어할 줄 아는 사람 있어요? 도와주세요!"하지만 그들은 까맣고 커다란 눈망울로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 젠장! 배낭을 버리고 도망쳐야하나?
"무슨 일인가요?"그때, 삐쩍 마른 한 노인이 영어로 물으며 다가왔다. 나는 잽싸게 노인에게 붙어 섰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지푸라기를 움켜지는 심정이 이럴까. 그리고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흥분해 횡설수설...
"... 이봇이나 빙빙이라는 사람이 마중 나온다고 했어요. 푸에르토프린세사에 사는 내 친구가 연락했다고... 체 라징 하우스라는 숙소로 나를 안내해줄 거라고 했는데... 이 사람이 버스에 올라와 내 배낭을 둘러메고 따라오라고 손짓해서... 날 마중 나온 사람인줄 알았죠. 그런데 누구냐고 아무리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해요. 왜 나를 여기로 데려와 방카에 태우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도와주세요!" "나는 한국 사람이랑 친구예요. 미스터 박 알아요? 미스터 유는? 다 내 친구예요. 내가 도와줄게요."나는 노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는 미스터 박이나 미스터 유가 누군지 모르지만. 여하튼 아군이 나타났다 싶으니 용기가 솟았다. 다짜고짜 사납게 청년에게 달려들었다. 내 배낭을 그의 등에서 벗겨내 낚아채 왔다. 배낭을 뺏긴 청년은 입술을 삐죽이더니, 곧바로 수상가옥촌에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노인의 뒤에 바짝 붙어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덜덜덜 떨리는 다리로.
노인이 숙소를 찾아주었다. 안 사장이 일러준 숙소는 수상가옥촌의 지척에 있는 항구 마을에 있었다. 150패소짜리(약 4천 원) 숙소치곤 깨끗했다. 나는 곧바로 방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 위로 쓰러졌다. 일사병에 걸려 쓰러진 개처럼 헐떡거리며. 놀란 가슴이 벌렁벌렁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떨었던지 빙빙이라는 사람이 올 때까지 지켜주겠다며, 노인이 자진해서 방문 앞에 앉아 보초를 서주고 있는데도.
정말이지 심장이 콩알만하게 졸아들었다. 그러니 이제 막 시작한 팔라완 남부 여행을 앞으로 어떻게 하지? 그 남잔 정말 누구였을까? 인상은 선해 보였는데... 나를 왜 방카에 태우려고 했을까? 정말 나를 납치하려고? 밖에 나가면 누가 또 나를? 빙빙은 왜 버스가 도착한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을까?... 머릿속에서 벌떼처럼 일어나 아우성인 질문들.
나는 배가 몹시 고팠지만 밥을 사먹으러 밖으로 나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팔라완 여행을 하면서 이렇게 졸기는 처음이었다. 빙빙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5월 28일, 팔라완 여행 28일째였다.
하늘을 찌를 것 같던 내 자만심이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