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지프차가 출발하기 전에 잘생긴 조수에게 단체 사진을 부탁했다.
송성영
내가 버스에서 무작정 따라나섰던 네팔 경찰 아르준의 고향, 룸레이 마을 앞 식당에서 지프차가 멈췄다. 산악지대 마을에서는 아직 옥수수 열매가 맺히지도 않았는데 룸레이 마을의 옥수수는 수염발을 날리며 익어가고 있다.
다들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지프차에서 내렸다. 나와 란드룩에서부터 함께 왔던 모자만 남았다. 이들 모자는 점심을 먹을 만한 경제적인 여력이 없거나 포카라에서 남편을 만나 즐거운 식사를 할 모양인가 보다. 딱히 입맛이 댕기지 않았지만 이들 모자를 두고 식사를 한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는다. 식사를 같이 하자는 아가씨들의 손길을 놓고 근처 상점에서 사 온 과자를 이들 모자와 나눠 먹으며 한 끼 식사를 대신했다.
네팔 사람들 역시 인도사람들처럼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 지프차가 출발하기 전에 예비 선생님들이 잘생긴 지프차 조수에게 자신들의 사진기를 건네줘 가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 역시 사진기를 그에게 건네줘 예비 선생들과 단체 사진을 찍었다. 지프차가 출발하자 멈췄던 카세트가 작동했고 다시 흥겨운 노래판이 벌어졌다.
나는 아리따운 아가씨들, 네팔의 예비 선생들에게 동화되어 어느새 그 유쾌발랄 흥겨움에 끼어들고 있었다. 이들은 포카라 근교의 한 학교에서 교생 실습을 마치고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룻밤을 묵어가며 뒤풀이를 하고 포카라로 되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동안 말수가 거의 없는 조용한 시골 네팔 여성들을 몇 차례 만난 것이 전부였다. 도시 내기 여성들이라고는 하지만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섰음에도 여전히 카스트제도가 공존하는 네팔에서 여성들이 이토록 자유롭고 흥겨운 감성을 지녔는지 상상조차 못했다.
"좀 더 사진을 찍어도 되죠?""그럼요! 얼마든지요."몸을 뒤틀고 어렵게 사진기를 꺼내 더없이 불편한 자리를 흥겨운 노래로 풀어나가는 아가씨들을 담아내다가 순간, '지옥과 천당은 공존한다. 마음먹기에 따라 지옥과 천당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불가에서 흔히 쓰고 있는 일체개고(一切皆苦)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떠올렸다. 일체개고, 일체유심조는 이 짐칸에도 있었다.
무아를 깨닫지 못하고 영생에 집착하여 온갖 고통에 빠져 있음을 이르는 일체개고, 세상사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화엄경의 핵심 사상인 일체유심조. 지프차 짐칸에서 내가 처한 상황이 그랬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벗어나는가는 마음먹기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유쾌 발랄한 예비 선생들은 엄마 품에 안겨 있던 아이에게 과자를 나눠주고 포카라 외곽에서 우르르 내렸다. 또다시 나와 두 모자만 남고 짐칸이 텅 비었다. 그제야 나는 이미 무감각해져 버린 다친 무릎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몸은 한결 편해졌지만 저들과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지프차에서 내려 내게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어 주고 있는 저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을 따라 내리고 싶어졌다.
행복은 완성체가 없다. 평생 마주칠 일이 없는 저 인연들과의 짧은 만남이 그렇듯이 언제 어느 상황이든 마음먹기에 따라 행복이 꽃비처럼 내리다가 어느 순간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포카라 중심가로 들어서고 있는 지프차에서는 여전히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왔지만 허전한 가슴 속으로 외로움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하지만 지프차에서 내릴 무렵 또 다른 아름다운 인연들을 만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