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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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이중적 존재로서,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는 신자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속한 사회의 법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사회인이다. 그런데 얼핏 보기에는 우리가 따라야 할 두 가지 법, 그리스도의 법과 이 사회의 법 사이에 분명한 모순이 존재하는 듯 보인다.
산상수훈으로 대표되는 그리스도의 법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고, 악에는 저항하지 말고, 폭력을 감수할 것을 가르치며,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법은 죄인을 벌할 것, 악에는 저항할 것, 잘못을 저지른 원수에게는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을 가르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드러난 것과 같은 거대한 사회적 악을 만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용서의 말씀을 따를 책임과 동시에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의 악과 불의의 근원을 벌하여 사회를 지켜낼 책임 사이에서 모순을 느끼면서, 어떤 실천의 원칙을 가져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서로 모순되고 반대되는 듯한 그리스도의 법과 사회법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실천의 원칙을 가져야 하는가? 먼저, 그리스도의 법과 사회법이 모순된다는 이해 자체를 교정해야 한다. 우리가 바르게 이해해야 할 것은, 흔히 사람들이 서로 모순적인 관계로 이해하기 쉬운 두 가지 법, 그리스도의 법과 사회법은 모두가 하나님의 법이라는 사실이다.
루터는 인간 삶을 위한 하나님의 뜻으로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율법을 크게 세 종류, 시민법, 의식법, 도덕법으로 구분했다. (1) 우리가 성경에서 모세의 율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사회의 질서와 정의를 유지하기 위해 현세적인 법률을 다루는 내용이 아주 많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신체나 재산 등에 해를 끼친 경우 어떤 형벌을 받고 어떤 보상을 해야 하는지 등에 관한 율법이다. 루터는 이를 시민법(또는 정치적 율법)이라 불렀다. (2) 다음으로 성경에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사하기 위한 각종 제사제도 등 예배의 외적 형태에 관한 율법이 나오는데, 루터를 이를 의식법으로 불렀다. (3) 그 외에 믿음과 사랑을 명령하는 하나님의 율법이 있는데, 루터는 이를 도덕법으로 불렀다. 이 세 가지 율법 중 루터는 의식법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기념하는 성례로 대체되었고, 도덕법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가르쳤다. 그렇다면 시민법은 어떠한가?
루터는 각 사회가 가진 나름대로의 사회법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시민법과 동일한 범주로 보았다. 루터는 구약 속 시민법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므로 온 세상에 동일하게 적용되지는 않는다고 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신 양심의 법(또는 자연법)을 모세가 탁월하게 해석해냈음을 인정한다.
여기서 양심의 법(또는 자연법)이란 로마서 2장 14-15절에서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라고 말씀한 데서 알 수 있듯,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마음에 원천적으로 새겨놓으신 선과 악, 옳고 그름의 원리를 의미한다.
이 자연법은 인간 속에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것, 우리 속에 이미 있는 것"으로서,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사회에 법과 질서가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이 법을 새겨주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루터는 모세의 법 안에 있는 훌륭한 시민법의 정신을 현대의 실정법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 그 이유는 "모세가 명령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천성적으로 사람 속에 새겨주신" 자연법의 원리와 일치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의 영혼을 다스리고 개인적 관계에서 사랑을 실천해야하는지의 원리뿐 아니라, 각 사회의 공의와 질서가 어떻게 유지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공적인 원리를 모두 포함한다. 달리 말해, 하나님의 명령은 그리스도의 법과 같이 믿음과 사랑을 명령할 뿐 아니라, 구약 속 시민법과 같이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질서와 도덕을 유지하기 위해 죄인을 벌해야 한다는 명령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리스도인 개인의 영혼과 양심만 사랑과 공의로 다스려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회의 공적인 영역도 사랑과 공의로 다스려져야 함을 명령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법과 세상의 법, 즉 용서하라는 명령과 처벌하라는 명령 사이를 대조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모순적인 것으로 보는 태도는 성경을 매우 오해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용서해야 하고, 죄인을 정죄하거나 벌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성경을 잘못 읽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포괄적이고 온전하게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인은 용서만 해야 하고 정죄하거나 벌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무지하고 어리석은 양자택일을 피하여, 다음과 같이 질문해야 한다.
즉, "죄인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고, 죄인을 벌하여 세상이 악과 불평등과 무질서에 빠지지 않게 하라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인데,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자 사회인으로서 이 두 가지 말씀 중 어떤 때 죄인을 용서하라는 말씀을 적용해야 하고, 또 어떤 때 죄인을 벌하라는 말씀을 따라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다.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해 루터는 그리스도인이 개인으로서 이웃을 대하는 자세와 공인으로서 공적인 법을 대하는 자세 사이에 분명한 구분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루터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보자.
"우리는 직분과 개인 사이를 뚜렷이 구분해야 한다 ...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자녀로, 나를 아버지로 만드셨다. 한 사람은 주인, 다른 사람은 종으로 만드셨다. 한 사람은 왕, 다른 사람은 백성으로 만드셨다 ...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한스 또는 닉이라는 개인으로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작센의 제후, 아버지, 또는 주인으로도 만드셨다 ... 산상수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각 개인인 자연적 인간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어떤 직분자의 위치나 통치자로서의 위치에 있다면, 우리는 날카롭고 엄격해야 하며, 분노하고 형벌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 공적이지 않은 다른 관계에서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향해 온유하기를 배워서 이웃에게 부당하게 대하고, 미워하고, 복수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이 말 속에서 루터는 '개인'과 '직분' 사이를 구분한다. 달리 말하면, 루터는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과 맺는 개인적인 관계와 사회 속에서 맺는 공적인 관계를 구분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루터가 개인과 직분, 개인적 관계와 공적 관계를 구분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성경 말씀만 적용해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루터는 그런 식의 이해와는 정반대로 하나님 나라는 영적인 나라만이 아니라 이 세상 나라를 포함하며,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두 왕국 모두에 속한 시민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함에 있어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의 두 왕국 모두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든, 교회 속에서든, 공적인 관계에서든, 사적인 관계에서든 그리스도의 사랑의 율법을 자신의 삶의 유일한 원리로 여기고 실천해야 한다. 루터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이 가르치는 미덕들은 세상 나라에서도 역시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유효한 법일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가 지적하는 또 다른 내용은, 동일한 하나님의 법을 실천하는 방법이 개인적 관계에서와 공적인 관계에서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개인적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실천하는 것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다. 우리는 원수라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사랑을 이 세상에 적용할 때에는 죄인의 용서에 제한이 있어야 하고, 사랑의 방법 역시 달라야 한다. 신자의 마음이나 개인 관계가 그리스도의 법에 의해 움직이고 다스림을 받는다 하더라도, 공적인 영역에서 신자가 이웃을 사랑하는 양식과 수단과 방법은 시민법을 통한 것이어야 한다.
이 점에서 죄인을 용서하고 원수까지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법은 신자들의 "신자들의 마음가짐" 및 그들이 다른 사람과 맺는 개인적 관계를 다스려야 하는 것이지, 세속 사회를 다스리는 공적인 규칙이 될 수는 없다. 공적인 사회 속에서 공적인 대중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방법은 시민법을 공정하게 적용하여 죄인을 엄벌함으로써이다.
루터는, 내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에 순종하는 신자들이라 하더라도, 공적인 사회에서, 특히 두 왕국의 법이 서로 충돌하는 듯 보일 때는 더욱 세상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인리히 보른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두 왕국을 통해서 루터는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면서 맺는 두 가지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한쪽에는, 그리스도인 자신의 존재와, 그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가지는 개인적 태도들, 그리고 그의 복음에 대한 증거들이 있다. 이 영역에서는, 용서와 인내와 희생에 대한 무조건적 명령이 유효하다. 다른 한쪽에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함께 살아가는 삶이 있다. 이 삶에서 법은 필히 악을 확고히 제어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아무도 불의를 겪거나, 타인으로 인한 희생자가 되지 않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신자들은 "개인과 사회 사이의 관계를 적절한 균형 속에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박근혜 대통령이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해온 최태민과 최순실 부녀의 영적 종복이 되었을 뿐 아니라, 부패한 기득권 세력을 대변하는 꼭두각시가 되어 대한민국의 법과 질서를 무시하고 소수의 특권층을 위해 수많은 국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한 일이 드러나게 된 이번 일을 사례로 들어보자.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죄인을 용서하라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박근혜에게 적용할 것인가? 아니면 박근혜와 같은 공적인 죄인은 철저히 시민법을 통해 벌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할 것인가? 이런 경우 죄인을 용서하라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적용한다면, 박근혜 개인에게는 사랑을 실천한 것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시민법을 순종하지 않음으로 인해 사회 전체에는 막대한 피해가 따르게 된다.
박근혜가 권력을 남용함으로 사회의 불특정 다수에게 가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외면하고, 박근혜에게 반드시 책임을 물려야 할 책임, 즉 대한민국을 부패시키고 불평등과 불의를 사회 전반에 만연케 한 일에 대해 면죄부를 준다면, 박근혜 한 개인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의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된다.
죄인을 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무분별하게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적용한 결과는, 수많은 사람에게 고통과 불의가 지속되는 것이다.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인가? 그 일을 행한 자는 개인에게 사랑을 베풀었다고 스스로 자위할지 모르나, 그는 박근혜 이외의 모든 사람, 정의로워야만 유지될 수 있는 공적인 사회 전체에 악을 지속시키고 유포시킨 크나큰 죄악을 저지르는 것이 될 뿐이다.
용서의 법은 그리스도인 개인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향해 개인적으로 실천해야 할 법이다. 그러나 공공의 영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범죄한 박근혜 무리에게 용서의 법을 실천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그들을 처벌하고 엄청난 대가를 지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이 세상을 더 이상 타락하지 않게 지켜내는 일이 된다. 우리의 후손들 앞에 책임을 다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아무런 판단력도 없이, 성경의 어떤 말씀을 적용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박근혜를 용서하자고 말하는 신자와 목회자는, 온 세상에 악을 편만하게 하는 사탄의 사악한 일에 동조세력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도록 그 진노를 높이 쌓으시게 하는 일에 동조하는 세력이 되는 것이다. 탄핵으로 박근혜를 심판하고, 그의 실정이 무엇인지 명명백백히 밝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요, 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다.
셋째, 그리스도인들은 함부로 화합을 말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