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에 '노골적'인 박근혜
차라리 2002·2005년이 옳았다

[황 기자의 한반도 이슈] '김정일에 보낸 편지', 전달 안됐다지만... 더 중요한 게 있다

등록 2016.12.21 16:38수정 2018.03.29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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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전체적으로 굴욕적이었다... 국민 배신행위였다."

2013년 여름, 국회 정보위원장으로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해북방한계선(NLL)을 포기했다'는 거짓공세를 주도한 서상기 새누리당 의원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내용에 대해 이렇게 비꼬았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오후에 더 시간을 달라'고 여섯 번이나 구걸하는 행태가 어떻게 국민 보기에 자존심이 안 상하는 일이냐"라고도 했다. 그러나 이는 성과있는 회담을 위해 2차 정상회담을 하자고 김정일 위원장을 압박하는 것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2002년 당시 방북 사진들.
박근혜 대통령의 2002년 당시 방북 사진들.박근혜 의원실 제공

그의 이같은 '외눈박이' '색깔론' 시각으로만 보면,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 시절이던 2005년 7월, 유럽코리아 재단 사업과 관련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보냈다는 논란의 편지는, 더 극심한 평가를 한다 해도 조금도 모자라지 않다.

2007년 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시종일관 자신을 '나'로 표현했고, 한 대목에서만 '제가'라고 했다. 김정일 위원장도 마찬가지로 대부분 '나'라고 했고, "제가 러시아 사람들에게 얘기했습니다"라는 대목에서 '제가'라고 했다.

반면, 한국 보수․수구 세력의 정치 대표체인 한나라당의 대표였던 박 대통령은 시종일관 자신을 '저에게는' '저의 의견으로는'이라고 낮춰 눈길을 끈다. 특히 '위원장님의 지시를 부탁드린다'거나 '남북'이 아닌 '북남' 표현, 초안이기는 하지만 '2002년(주체 91년)'이라고 돼 있는 대목에서는 동공이 커지지 않을 수 없다.

박사모 홈페이지에, '박근혜의 편지'가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의 글이라며 올라왔을 때는, '재판없이 때려 쳐 죽일 놈' '마치 신하가 조아리는 듯'이라는 등등의 험악한 댓글이 달렸다가, 실체가 알려진 뒤 대혼란이 벌어졌다는 것도 '웃프'기는 하지만 충분히 짐작되는 일이다.


이 편지를 보면, 2002년 5월 방북길에 김 위원장을 만나고 온 박 대통령이 "북한에 다녀온 이후 나는 남북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그것은 바로 진심을 바탕으로 상호 신뢰를 쌓아야만 발전적인 협상과 약속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다" "북측과 툭 터놓고 대화를 나누면 그들도 약속한 부분에 대해 지킬 것은 지키려고 노력한다"고 말한 맥락이 이해된다.

 2002년 9월 남북 통일축구경기에 참가하는 북측 대표선수단이 인천공항에 도착한 모습.
2002년 9월 남북 통일축구경기에 참가하는 북측 대표선수단이 인천공항에 도착한 모습. 연합뉴스

또 그와 김정일 위원장의 합의에 따라 2002년 9월에 열린 남북한 국가대표 축구 경기에서 박 대통령이 "관중들이 한반도기를 들기로 약속했는데 왜 태극기를 들었느냐" "구호로 통일조국을 외치기로 했는데 왜 붉은 악마 응원단이 대한민국을 외치느냐"고 항의했다고, 정몽준 전 의원이 밝힌 일화도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이 편지를 둘러싼 논란 커지면서, 정준희 통일부 대변인은 21일 "유럽코리아 재단 측에 문의한 결과와 2005년 당시 결과보고가 없었던 점으로 볼 때 그런 편지가 북측에 전달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통일부가 파악한 상황을 더 정확히 살펴보면, 재단이 해체되고 직원들이 흩어진 상황에서, 그런 편지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고, 재단이 아닌 다른 라인을 통해 전달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편지가 그대로 북측에 전달됐다고 해도 그다지 문제될 게 없어 보인다. 남북교류협력법 위반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지만, 전달자가 일정 기간 동안 포괄적 대북접촉 승인을 받은 상황이라면, 건건히 접촉 승인을 받을 필요는 없다.

정청래 전 의원 등은 '국가보안법 위반'이나 '이적'이니 하는 주장을 펴지만, 이는 사실은 그동안 냉전 세력이 가해온 종북몰이에 대한 '야유' 성격이 짙다.

전두환, 김일성에 "평생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애써오신 충정..."

 전두환 전 대통령. 사진은 지난해 11월 25일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를 찾아 조문한 뒤의 모습.
전두환 전 대통령. 사진은 지난해 11월 25일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를 찾아 조문한 뒤의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일부 표현에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는 하지만, 이 정도를 갖고 '종북성'을 따진다면 1985년 9월 5일 김일성 주석의 밀사 허담을 만나 전두환 대통령이 했던 발언은, 그야말로 '허걱' 수준이다.

"주석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경청해보니 내용 하나 하나가 내 생각과 거의 동일합니다. 김 주석께서는 공개적으로 말씀이 계셨지만 40년 전에는 민족해방 투쟁으로, 그리고 평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애써오신 충정이 넘치는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김 주석의 인사말을 전한 허담에게 전 대통령은 이렇게 답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김일성이 주도한 '6.25남침'까지 인정하고 용인하는 발언으로 해석될 수 있는 내용이다. 이 발언자가 김대중, 아니 김영삼이었다 해도 살아남기 어려웠을 수 있다.

그런데 '외교'는 원래 이런 것이다.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는, 덕담과 사탕발림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와 '소시지와 외교는 만드는 과정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외교가의 금언은 이래서 나오는 것이다.

문제는 박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다. 2014년 1월 '통일대박'은 사실상 북한 붕괴를 통한 흡수통일론에 기반한 것이었고, 특히 북한이 4차, 5차 핵실험을 한 올해는 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집권 이후 박근혜, 흡수통일 의지 드러내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8월 15일 오전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제71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축사한 뒤 자리로 이동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8월 15일 오전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제71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축사한 뒤 자리로 이동하고 있다.연합뉴스

그는 지난 8월 광복절 경축사에서 처음으로 '통일 대한민국'이라는 용어를 썼다. 남북 합의에 따라 통일을 달성한다는, 노태우 정부 이후 한국 정부의 공식 통일 방안인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서 한참 벗어난 것으로, 사실상 흡수 통일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그는 또 이 자리에서 "북한 당국의 간부들과 모든 북한 주민 여러분"이라고 대상을 특정하면서 "통일은 여러분 모두가 어떠한 차별과 불이익 없이 동등하게 대우받고 각자의 역량을 마음껏 펼치며 행복을 추구할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달 22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도 북한에 대해 "심각한 균열 조짐을 보이면서 체제 동요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라면서 '북한 정권 붕괴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어 10월 1일 68주년 국군의날 기념사에서는 "북한 주민들에게 "언제든 대한민국의 자유로운 터전으로 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모두가 대량 탈북을 부추기는 것으로, 북한의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정권 교체)'를 의도하는 발언들이었다.

2002년·2005년의 박근혜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그때는 북핵 문제가 심각하지 않았다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1994년과 2002년에 이미 심각한 북핵 위기가 있었고, 특히 1994년 1차 핵위기는 미국과 북한이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 그리고 2005년의 박근혜는 이미 대선 출마를 결심한 상황이었다.

'박근혜의 편지'로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이제 북한 정권을 대화 상대로 인정하면서 적극적인 대화를 추진하는 정도를 갖고, 또 그에 따른 의전적 표현 몇 가지를 문제삼아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행태는 그만둬야 한다는 것이다.

남한의 냉전 보수를 대표하는 전두환과 박근혜가 알고보니 실제로는 더 노골적이지 않았는가 말이다.
#박근혜 #김정일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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