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브란트 옛 서독 총리
위키미디어 공용
독일 통일은 하루 아침에 우연하게 이루어진 '대박'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접촉을 통한 변화'를 핵심 기조로 하는 동방정책이 장벽에 조금씩 균열을 내고, 동서독 국민들의 마음은 조금씩 가까워지게 하면서 만들어 낸 인고의 결실이었습니다.
동방정책은 대내적으로는 동독과의 관계 개선을 한 축으로 하고, 대외적으로는 동독의 배후인 소련과의 관계 개선을 다른 축으로 했습니다. 동독의 서독에 대한 의존성을 높여 내부적으로 긴장을 완화시키고 동독 사회의 변화를 촉진해 내었습니다. 독일 통일이 냉전질서의 해체라는 국제환경의 변화 없이는 달성하기 어려운 과제임을 통찰하고 외부적인 환경을 통일에 유리한 조건으로 만들어갔습니다.
빌리 브란트와 그의 핵심 참모였던 에곤 바르가 즐겨 썼던 표현이 '털신을 신은 작은 발걸음'이었습니다. 상대방이 경계하지 않도록 요란하지 않게, 작은 성과부터 차근차근 쌓아 나간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정 없이 결과만 이야기하는 요란한 구호를 멀리하고, 현상의 어려움에 손 놓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동독에 대한 지원은 처음에는 현금 위주 사업으로 시작하여, 서독에 대한 의존성이 커질수록 현금 대신 현물로, 이후에는 신문/방송개방이나 체류기간 연장 등의 조건을 걸며 진행했습니다. 20년이 흐르는 세월 동안 물적, 인적 교류를 통해 동서독 상호 연계성이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종국에는 동독인들의 마음이 완전히 움직이기에 이른 것입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 동독의 한 관리는 '털신을 신은 작은 발걸음'이 탱크를 몰고 오는 것보다 더 위협적이었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동방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정책의 연속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969년 진보진영인 사민당 빌리 브란트 정부가 처음 추진했던 이 정책은, 1982년 보수진영인 기민당으로 정권이 넘어간 이후에도 변함없이 지속되었습니다. 당시 기민당 총리로 이후 통일 독일의 첫 번째 수장이 되었던 헬무트 콜이 정파적 입장을 떠나 내렸던 결단을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년간 서독은 동독에 연평균 29억 달러를 지원했습니다. 남북 교류가 활성화되었던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의 연평균 지원액은 4억달러 입니다. 남한과 서독의 경제규모를 고려하더라도 7배에 달하는 수치이니, 서독이 엄청나게 동독에게 퍼준 셈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서 봐야 할 대목은 동방정책이 추진되는 동안 빌리 브란트도 헬무트 콜도 안팎에서 견제를 받고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지만, 서독 내에서 정파적 손실을 따져 '퍼주기'니 '종북'이니 하는 류의 맹목적 비난은 없었다는 점입니다. 민족 전체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대범함과 노련함을 보였던 독일 정치인들과 언론의 태도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10년을 거치면서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닦아놓았던 남북교류협력의 기반은 완전히 부정되고 무너졌습니다. 모든 접촉면과 대화의 채널은 막혀 버렸습니다. 물론 경색된 한반도 정세를 남한만의 잘못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가장 큰 잘못이 핵문제의 당사자인 북한에 있음은 물론이며, 미국과 중국 등 주변 강대국들이 얽힌 복잡한 국제관계의 함수를 단순화해서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동방정책 추진 이후 독일이 통일까지 가는데 걸렸던 시간이 '20년'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니, 한참을 후퇴해 버린 우리의 지난 10년에 대한 안타까움은 숨길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