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문학축전에서 만난 성선경 시인과 시집

참 다행인 슬픔, 시인과 시집의 파랑을 기억하며 <파랑은 어디서 왔나>

등록 2017.10.27 15:29수정 2017.10.27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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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0일 녹우당에서 열린 청소년 시서화 백일장 대회

20일 녹우당에서 열린 청소년 시서화 백일장 대회 ⓒ 고산문학축전운영위


지난 금요일(20일), 해남에서는 고산문학축전이 있었다. 나는 이날 오전과 오후를 나누어, 오전에는 고산 청소년 시·서·화 백일장을, 오후에는 고산인문학 콘서트를 각각 사회와 행사 진행을 하는 역할을 맡았다.

지역에서 500여 명의 전국단위 학생들을 데리고 행사를 진행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아이들이 한자씩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은 백일장 작품을 해남읍 연동에 위치한 녹우당의 충혼각 앞에 있는 본부석에서 받았다. 점심이 지나서 다음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허겁지겁 해남읍에 위치한 문화원으로 향했다.


a  고산인문학 콘서트 시인과의 대담 (좌) 성선경 시인 (우) 박병두 시인

고산인문학 콘서트 시인과의 대담 (좌) 성선경 시인 (우) 박병두 시인 ⓒ 김성훈


문화원에 도착하여 마이크를 점검하고, 내빈들을 맞을 간식 테이블을 복도에 설치하느라 정신 없는 와중에 가수 한보리가 기타 가방을 메고 들어왔다. 고산 인문학 콘서트 프로그램에서 노래공연을 선보일 예정이었다.

한보리 선생님은 고산문학대상 수상자인 김정희 시인과 성선경 시인의 시를 노래로 만들었다고 했다. 행사는 오후 3시에 시작하는데, 2시 조금 지나서 문화원 2층 강당 밖에서 "성선경 시인께서 오셨어요"라는 급보를 들었다. 성선경 시인은 이날 수원문인협회장 박병두 시인과 함께 시인과의 대담이라는 코너의 게스트였다.

고산문학축전이 20일과 21일, 1박 2일 진행되는 것이라서 껌딱지처럼 성선경 시인 옆에 붙어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시는 왜 쓰는지, 시라는 것이 시인에게는 어떤 것인지, 교직 생활에 관한 것 등을 시인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행사가 끝난 후, 시인의 시집 <파랑은 어디서 왔나>를 읽게 되었다. 열일곱 돌을 맞는 고산문학상의 영예를 얻은 시집이기도 하다.

a  성선경 시집 <파랑은 어디서 왔나>

성선경 시집 <파랑은 어디서 왔나> ⓒ 도서출판 서정시학

시집을 펼치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공고 카르텔'이었다. 첫째날 뒤풀이 과정에서 시인이 했던 말로 기억한다. 한국의 문단사에서 공고 출신들의 업적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시인 아무개를 예로 들며, 공학적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까지 시인의 입담은 거침이 없었다.

사실 카르텔이라는 단어가 그렇지 않은가. 독자적 위치를 고수하며 기업들끼리 연합한다는 것이 사전적 정의이다. 공고 출신의 시인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시 세계를 지향하며 한국 문단 내 질곡의 역사에서 생존 했다는 것도 또한 우리의 인문적 자산이지 않겠는가.


4부로 나뉜 책에서 1부에 '파랑'이라는 제목을 가진 시만 6편이다. '파랑에 대하여', '파랑은 어디서 왔나', '저 파랑 뒤에는 무엇이 있나', '글쎄 파랑', '파랑의 서쪽 귀', '파랑파랑'이다. 교직 생활 30년, 등단 30년의 경력에서 시인에게 '파랑'이란 무엇일까.

시집에 해설을 덧붙인 안양대 맹문재 교수는 '화자가 떠올린 그 "파랑"의 정체성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지만 화자의 곁을 떠난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상을 넘는 가치이자 고독의 산물이라는 것도 유추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연필심처럼 뾰족한 정신적인 가치를 나타내는 것이다'(131쪽)라고 했다.


화자의 곁을 떠난 것, 그것은 그리워 하는 것, 그것은 사물이 될 수도 있고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 수수께끼처럼 은유화된 그의 시 '파랑에 대하여' 일부를 한번 살펴보자.

나는 간혹 생각한다. 그 끝
네가 날아간 거리에 대하여
네가 날아간 꿈과 그 벼랑의 끝
그 파랑에 대하여
간혹 나는 생각한다. 그 끝의 끝
네가 넘어야 했던 수많은 일상과
어쩌면 무너지는 생각의 촉을
연필심처럼 깎던 고독의 날들
연필심처럼 뾰족하던 그 파랑에 대하여…… (26쪽)

출발 선상이 다르다는 말 속에는 기회가 평등하게 퍼질 수 없는 한국사회의 닫힌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일상이 한 보 이상 진척 되지 않은 것 같을 때, 그러한 일상을 영유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래가 아닌 과거의 삶에 한탄의 뿌리를 맺는다. 무너지는 생각의 촉은 연필심처럼 뾰족하고, 간혹 잃어버린 파랑을 생각한다. 그리고 어리석게 또 그 파랑 때문에 넘어지기도 한다. 때론 현명하게 그 파랑 덕분에 삶을 겨우겨우 버티기도 한다.

a  성선경 시인

성선경 시인 ⓒ 고산문학축전위


성선경 시인은 1960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났다. 경남대학교 사범대 국어교육학과 재학 중 1978년 무크 <지평>,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분 <바둑론> 당선으로 등단했다.

"교직 생활이 평탄했으면 나는 시 쓰는 데 게을렀을 거예요. 교사가 교과서 외의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전달해주는 것은 고역입니다. 그런데 교사가 학생들에게 응당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나는 시를 쓸 때 단 한 번도 마음이 편할 때 쓰지를 못했습니다. 울분이 쌓이고 화가 나면, 시는 그 출구를 모색하게 해주었습니다."

시인의 솔직한 고백이었다. 마치 여드름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하는 사춘기 소년처럼, 편지지에 꾹꾹 눌러 쓰고 지우기를 여러번 한 연애편지처럼 시인의 고백을 들었다. 30여년의 집필의 경력답게 시인은, <석간신문을 읽는 명태 씨>, <봄, 풋가지行>, <진경산수>, <모란으로 가는 길>, <몽유도원을 사다>, <서른 살의 박봉 씨>, <옛사랑을 읽다>, <널뛰는 직녀에게> 등의 시집을 출간했다.

어쩌면 그리워 할 것이 있는 사람은 그래도 건강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리워 한다는 것이 결국 자신의 삶에 대한 애증 아니겠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붕어빵 틀처럼 똑같겠는가. 한껏 느슨해졌다가 바짝 긴장도 하며 사는 것, 그것은 그리워 하며 괴로워도 하는 것이 결코 괴리(乖離)한 것이 아니다.

고려가요인 청산별곡의 "어듸라 더디던 돌코/누리라 마치던 돌코/믜리도 괴리도 업시/마자셔 우니노라"라는 구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여기에서 "믜리도 괴리도"라는 말이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를 뜻한다. 그리워하는 파랑의 돌덩이에 우리는 아프면서 참 다행인 슬픔을 견딘다.

참 다행인 슬픔을 견딜 수 있게 도와주는 시집, <파랑은 어디서 왔나>의 <꽃의 말> 전문을 실으며 시인과의 파랑, 시집과의 파랑을 갈무리한다.

기다릴게요, 해인海印이 날아들 때까지
지금 봄이 왔지만
아직 나는 봄날이 아니에요
유리 거울같이 화창한 햇살이
그대 수염처럼 따가워도 나는
아직 봄날이 아니에요
기다릴게요, 아직 봄날을
주먹같이 퍼지려는 봉우리를
꼽추의 등같이 움츠리고
해인이 날아들 때까지
나는 아직 기다릴게요
해인이 날아들 때까지
그대는 어느 춘몽에 볼 수 있을까요
열린 시간이 훨훨 날아드는 꿈
아지랑이같이 아득 아득한
지금 봄이 왔지만
나는 아직 봄날이 아니에요
기다릴게요 나는 아직
열린 시간이 훨훨 날아드는 꿈
유리 거울같이 화창한 햇살에
온종일 해바라기 하면서
기다릴게요, 나는
해인海印이 날아들 때까지. (64~65쪽)
덧붙이는 글 <파랑은 어디서 왔나> , 성선경, 서정시학, 11,000원
#고산문학축전 #성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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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생. 전남대학교 일반대학원 문화재협동학 박사과정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석사. 명지대 문예창작학과졸업. 로컬문화콘텐츠 기획자 해남군사회적공동체지원센터 주민자치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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