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치된 희생지 표지판청주시 낭성면 도장골에 방치되어 있는 표지판. 홍가륵의 아들 홍우영이 표지판을 잡고 있다.
박만순
"홍선생은 미원고개 산구렁에서 돌아가셨어요"죄수복을 입은 한 청년이 땀을 뻘뻘 흘리며, 홍가륵의 아내 석정순이 살고 있는 청주시 서문동으로 찾아 왔다. "홍 선생님이 저랑 같이 있다가 총 맞고 돌아가셨어요. 미원고개 가다 보면 저수지가 있는데요. 저수지 옆 산 구렁이 사망 장소에요" 이야기를 마친 청년은 부랴부랴 몸을 피했다.
하지만 석정순은 미원 방향의 도장골에 가지 못했다. 무섭기도 했고, 난리 중에 가족들이 뿔뿔이 도망 다니기 바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약 20년이 지난 1970년대 초에 홍가륵의 아들 홍우영(72세. 경기도 안성시)이 현장을 찾았다. 이후 여건 될 때마다 명절 전에 도장골을 찾아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 홍가륵은 왜 이 깊은 산골짝에서 삶을 마쳐야했을까?
홍가륵은 1946년 2월 미군정청후생부에서 주관한 수의사시험에 합격하여 진천군청에 근무하였다. 또한, 여운형이 주도한 근로인민당에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48년 말경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소요, 상해치사, 상해'죄로 4년을 선고받았다. 선고재판이 1949년 4월 20일 있었고, '구속되어 재판받은 100일을 감(減)한다'고 결정했다. 그렇기에 그는 1953년 1월 초에는 자유의 몸이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대한민국 군경은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을 집단학살했다. 청주형무소도 예외가 아니었다. 1950년 7월 2일부터 충북지구CIC의 지휘 아래 제2사단 16연대 헌병대와 기동대를 중심으로 한 충북도경찰국과 청주경찰서 경찰 등은 청주형무소 전체 재소자 중 절반 이상인 800명의 정치범을 청주시 낭성면 도장골, 남일면 분터골, 남이면 화당리, 가덕면 공원묘지로 끌고 가 총살했다(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북한군이 남하하면 빨갱이(형무소 재소자)들이 인민군에 협력할 것'이라는 막연한 추정에 의한 예방학살이었다. 이들을 부산이나 제주도로 이송해 격리시켰다면, 역사적 가설 자체가 성립할 수 없었을 텐데 말이다.
대(代)를 이은 독립운동가, 의열단원 홍가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