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권숙부들의 목이 베어진 시신이 놓여진 대청마루가 있었던 곳을 가르키는 김재권
박만순
"설사가 나서 똥 좀 누고 갈게요" 1950년 7월 8일 증평에서 온 신아무개 형사가 덕상리 보도연맹원들을 잡아들였다. 신 형사는 보도연맹원들을 앞세워 증평양곡창고로 향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재권의 조부는 자신의 딸을 덕상리로 보내 보도연맹원들이 몸을 피할 것을 꾀했다. 김재권의 당숙모는 현재의 충용아파트에서 마을 청년들 일행과 맞닥뜨렸다. 형사에 의해 끌려가는 사람들에게 내놓고 도망가라고 할 수는 없었다. 형사 몰래 눈만 껌벅껌벅했다. 일행 중 김재인 만이 눈치를 챘다.
김재인은 배를 움켜쥐며 신 형사에게 "설사가 나서 똥 좀 누고 갈께요" 라고 해서 허락을 받았다. 똥 누는 시늉을 하다 보니 일행은 벌써 저만치 갔다. 김재인은 저 길이 죽으러 가는 길로 생각하고 줄행랑을 놓아 사지(死地)에서 벗어났다. 김재인은 살아 났지만 같이 끌려갔던 숙부 김사영과 동생 김재용(=김재호)과 김재희는 집으로 다시 오지 못했다.
이장에서 인민위원장까지 김병묵의 비극은 한국전쟁기에 동생 셋을 보도연맹 사건으로 잃 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949년 초에 괴산경찰서 경찰들은 김병묵의 집을 수시로 찾아와 그에게 "동생들 찾아내!"라며 다그쳤다. 심지어는 괴산경찰서로 끌고 가 온갖 구타와 고문을 가했다. 김재권씨는 "아버지가 하루는 자리를 절뚝이며 집으로 오시대요. 바지를 걷었더니 정강이가 시퍼렇더라구요" 주리를 트는 고문을 당한 것이다.
김재권의 사촌형 김재섭(84세. 청주시 모충동)의 증언도 마찬가지다. 김재섭씨는 "보도연맹 결성 전에 괴산경찰들이 몇 차례 집으로 와서 구둣발을 신은 채로 방에 들어왔어요. 경찰들은 후레쉬로 얼굴을 비추며 아버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어요"라고 한다.
진묵, 광묵, 상묵의 맏형이었던 김병묵은 동생들 때문에 온갖 고초를 겪다가 6.25가 터지자 새로운 상황에 맞부딪친다. 전쟁 전에 구장(이장)을 봤던 것과 보도연맹 사건으로 동생 셋을 잃었다는 이유로 덕상리 인민위원장을 강요당했다. 국군 수복 후에는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고초를 치렀다. 이것으로 그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1950년 겨울, 덕상리 인근에 있던 좌구산에 빨치산이 몰려들었다. 빨치산들은 덕상리로 내려 와 식량과 생필품을 빼앗아 갔는데, 김병묵은 이들에 의해 끌려가다가 간신히 살아났다.
국군 880부대는 낮에 마을에 주둔하면서 온갖 민폐를 끼쳤다. 소위 '낮에는 국군 세상, 밤에는 인민군 세상'이 된 것이다. 이 중간에 마을 사람들만 샌드위치 된 것이다.
증평 덕상리 마을의 불행은 1949년 '남로당 증평면 사건'으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이 사건이 특정시설의 방화나 봉화시위, 등 구체적 물리력을 행사한 것은 아니다. 신경득(74세. 청주시 사창동) 전 경상대 국문과 교수는 "예비음모에도 속하지 않는 사건이에요. 지금으로 치면 훈방조치감도 안 되는 사건입니다"라고 한다.
신 교수는 "당시 사건 관련자들을 국가보안법과 포고령2호 위반으로 처벌했는데요. 포고령2호는 맥아더가 일본 점령군의 책임자로 부임하면서 내린 결정인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1948.8.15) 된 이후에도 이 조항으로 처벌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위헌의 소지가 있다"고 한다. 또한 "집행유예로 풀려난 이들까지 보도연맹에 가입시켜, 결국 사지(死地)로 끌고 간 것은 국가의 야만적인 행위이다"라고 한다.
한국전쟁기에 벌어진 대한민국 군·경과 북한군, 좌-우익에 의한 집단폭력과 살상은 수없이 많다. 그런데 덕상리 김재권 형제처럼 낫으로 목을 베 시신을 수습한 것은 전국에서 유일하다. 낫으로 동생들의 목을 벤 형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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