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강산 동쪽에 위치한 ‘삼존마애불좌상’.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현재는 바위에 새겨진 부처의 명확한 형태를 확인하기가 어렵다.
이용선 제공
이차돈의 흔적을 찾다가 발견한 '범종각'과 '삼존마애불좌상'포장되지 않은 흙길을 걸어 백률사에 도착하고서부터 "어디쯤 이차돈의 흔적이 남아 있을까" 하고 혼잣말을 하며 경내는 물론 주위까지 두리번거렸다. 그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백률사 범종각(梵鐘閣)이다. 절의 규모에 비해 제법 큰 종이 매달려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종의 겉면에 이차돈 순교 당시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머리와 분리된 몸에서는 흰 젖이 치솟고, 떨어진 머리는 연꽃 위에 조용하게 얹혀 있었다. 연꽃의 꽃말은 '순결한 아름다움'이다. 또한, 불교에선 연꽃을 신성시해 부처상이 앉은 좌대(座臺)를 연꽃으로 장식하기도 한다.
신라가 불교왕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이차돈은 백률사 범종의 조각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고 있었다. '기억되는 죽음은 슬프지 않다'란 역설적인 문장이 떠올랐다.
절의 왼편으로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5분쯤 걸었을까? 사람 키보다 두어 배 높아 보이는 바위에 가부좌를 튼 3명 부처의 돋을새김이 발길을 붙들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4호인 동천동 삼존마애불좌상(三尊磨崖佛坐像)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은 천년 세월에 닳고 또 닳아 지금은 정확한 형태를 알아보기가 힘들다. 학계는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바위에 새겨진 세 가지 형상이 아미타불(阿彌陀佛), 관음보살(觀音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바위의 일부분이 떨어져나가고, 푸르고 거무스레한 이끼가 부처의 모습을 덮고 있어 신라인이 새긴 예술적 불상의 진면목을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으나, 마음으로는 넉넉한 인품을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치성을 드리는 것인지, 삼존마애불좌상 주위에는 부처상과 동승(童僧)의 모습을 한 조그만 인형들이 즐비했다. 경주 사람들 저마다의 간절한 바람이 만들어놓은 색다른 풍경으로 느껴졌다.
'불교평론 학술상'을 수상한 동국대학교 이봉춘 명예교수는 "이차돈의 설화를 기록 그대로 믿지는 않지만, 그의 순교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말했다.
이봉춘 교수에 따르면 이차돈 이전에도 순교자는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신라에 불교를 전하러 온 고구려의 승려들이었다. 이와 달리 이차돈의 순교는 "전도 승려들이 살해된 것이 아니고, 불심 깊은 신라의 일반 신자가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라는 것이 이 교수 설명이다.
신라시대부터 시작돼 오늘날까지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이차돈에 대한 뜨거운 추모의 마음은 바로 이 '자발성'에서 연유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