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림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경주 남천 인근. 아름드리 버드나무들이 그리움을 향해 머리칼을 드리운 채 천년 세월을 지켜보고 서 있다.
경북매일 자료사진
법흥왕과 이차돈, 천경림에 사찰을 세우려 하다 <해동고승전>과 <삼국유사> 등의 고대 문헌과 현대의 신라역사․불교에 관한 연구논문들은 공통적으로 이야기한다. '이차돈이 죽어야 했던 이유'는 그가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공간인 천경림에 흥륜사(興輪寺)라는 절을 지으려 했기 때문이라고.
세명대학교 이창식 교수는 논문 <이차돈 유산 가치와 현대적 계승>에서 천경림의 당대 위상과 흥륜사의 축조, 그리고 이차돈의 순교가 신라사회에 미친 영향을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이차돈이 천경림에 짓던 사찰은 흥륜사인데, 진흥왕 5년(544년)에 이르러 완공된다. 흥륜사가 들어선 천경림은 신림(神林․신성불가침 지역)의 장소인데 신라인들이 경애하던 숲이자, 칠처가람(七處伽藍) 터의 한 곳이다.
이차돈은 신라에 불교를 뿌리내리고자 자신의 한 몸을 미련 없이 버렸다. <화엄경(華嚴經)>의 '꽃과 강을 버릴 때 열매와 바다를 본다'는 진리를 몸소 증거한 경우다. 이차돈의 희생적 이타행(利他行)은 통일신라를 거치며 화려한 불교문화로 승화되었고, 부처의 가르침은 신라정신, 민족정신의 근간이 되었다. 흥륜사 역시 기념비, 추모제 불사(佛事)에서 벗어나 상생불교의 대표 산실로 부각됐다."이창식 교수의 결과론적 진술에 앞서 말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천경림에 절을 지은 것이 이차돈이 죽음을 피할 수 없었던 이유가 됐다'는 앞서의 언급은 학자들 간에 이견이 별로 없다. 그러나, 절을 지은 이유가 무엇일까에 관해서는 3가지의 다른 견해가 존재한다.
그 견해 중 첫 번째는 '법흥왕의 명령으로 이차돈이 흥륜사 축조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스물한 살에 불과했던 이차돈이 '왕권강화를 통한 신라사회의 변혁'을 꿈꿨던 법흥왕에게 이용당했다는 가설에 가 닿는다. 이는 장편 구도소설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의 견해이기도 하다.
두 번째 학설은 '이차돈이 독자적으로 천경림 안에 사찰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역사학자들은 이차돈을 "명민함과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목숨과 신라의 불교 공인을 맞바꿀 만한 배짱을 지녔었다"고 평가한다.
마지막으로 세간을 떠도는 학설 중 하나는 '천경림에서 공존하던 샤머니즘과 애니미즘, 풍류도를 제압하기 위해 흥륜사를 지으려고 했던 것은 법흥왕과 이차돈의 밀약(密約)이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설득력이 얻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게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