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연극협회 관계자들이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에서 연극계 성폭력 사태를 규탄하며 미투(#Me_Too)운동을 지지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있다. 2018.03.08
최윤석
강간문화가 만들어낸 공감부재 21세기 들어 공감에 대한 생물학적, 사회학적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최근 공감 연구가 밝혀낸 가장 중요한 성과는 공감이 본능에 속하는 능력으로, '타인에 대한 헌신'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배려'라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점이다.
아이가 울면 주위의 다른 아이도 따라 운다. 아기의 울음이 자신의 고통, 배고픔, 불편함을 해소해 달라는 외침이라는 점에서, 울음에 동참하는 행위는 공동체 일원의 고통을 속히 해결하라는 연대 시위인 셈이다. 제대로 된 공동체는 개인의 아픔을 공동체의 아픔으로 여긴다. 이 점을 말을 못하는 아이들도 안다.
연대의 도움 받았던 아이는 남이 울 때 연대의 목청을 돋우는 것으로 보답한다. 공동체의 도움을 받은 개인은 공동체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길 줄 안다. 이 연대는 성별, 나이, 피부색을 가리지 않는다.
공감 능력은 성인이 된다고 자연적으로 소멸하지 않는다. 누군가 문틈에 손가락이 끼이거나 넘어져 무릎이 깨지면, 그 장면을 바라보는 순간, 내 표정도 일그러진다. 남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것이다. '남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느끼는 것.' 이것이 바로 공감의 사전적 정의다.
우리는 이런 공감능력이 없는 사람을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일부 남성이 성폭행 생존자를 조롱하면서 가해행위를 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제러미 리프킨이 <공감의 시대>에 쓴 내용이 단서를 준다.
"공감의식이 아동기, 청소년기, 성인기를 거쳐 얼마나 발달하고, 넓어지고, 깊어지는가는 부모가 초기부터 아이를 어떻게 기르느냐에 달려 있다. 아울러 그 아이가 태어나 습득하게 되는 문화권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우리는 공감을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지만, 이 능력은 후천적으로 확장될 수도 있고 소멸할 수도 있다. 이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가정과 사회 속의 교육과 집단문화이며, '공감부재'의 주범은 성폭력을 가벼이 여기는 강간문화(rape culture)다. 이 집단문화 속에서 남성들은 공감능력에 반하는 행위를 부추기면서 관심과 주목으로 서로를 보상한다.
타인의 고통을 유희로 삼는 집단만일 누구의 머리가 깨지고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상황에서 히히덕거리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대분의 사람들이 '사람도 아니다'라고 비난할 것이다(보다 정확한 표현은 '짐승도 아니다'이다. 침팬지, 보노보 등의 영장류는 물론, 개나 고양이, 쥐 등의 포유류 대다수가 공감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공포영화를 연구하고 있다. 내 관심사는 바로 앞의 상황, 즉 '머리가 깨지고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상황'을 유희로 만들어 내는 영화적 장치다. 사람들은 공감능력이 있기 때문에, 극중이라도 타인의 생생한 고통은 불쾌한 자극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공포영화에는 공감을 차단하는 서사적 장치가 필요하다.
가장 흔한 수법은 고통받는 등장인물을 '고통받아 싼' 악당으로 만드는 것이다. <쏘우> 같은 선혈 낭자한 '슬래셔' 영화를 보라. 고문도구에 이리저리 찔리고, 눌리고, 잘리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마약중독자, 부패한 경찰, 악덕 보험사 직원 같은 사람들이다. 이 '타자화' 장치 때문에 공포영화는 대개 진부한 도덕극의 모양새를 띠게 된다.
과거에는 쾌락을 추구하는 여성이 공포영화의 주된 표적이었다. 예컨대 성을 탐닉하는 '부도덕한' 여성이 등장하면, 그는 영락없이 잔혹하게 살해당하곤 했다. 가부장적 성윤리를 '공감차단 장치'로 사용한 것이다.
한국의 여성혐오나 강간문화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 관점에서 여성은 편협한 기준으로 남성 파트너를 고르는 이기적 존재이고 (남성들이 얼마나 '이타적 기준'으로 여성을 고르는지는 중요치 않다), 돈 몇 푼 받아내기 위해 남자의 등이나 치는 '꽃뱀'이며, 떼로 몰려다니며 소란을 피우는 '페미나치'로 묘사된다.
타자화는 여성의 고통을 조롱하기 위한 토대가 된다. 혐오사이트 '일베'를 보라. 이들은 반말쓰기로 '동료의식'을 강화하는 가운데, 여성에 대한 잔인한 발언과 행동을 '추천'으로 보상한다. 이들은 여성이 차에 치이는 장면을 게시판에 올린 뒤 히히덕 거리며 성적인 농담까지 주고받는다.
이 잔인하고 가학적 쾌락과 '꽃뱀론'으로 대표되는 '피해자 때리기'는 모두 공감부재라는 토대 위에서 작동한다. '일베'는 강간문화가 특정 매체 형태로 구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터넷에는 강간문화를 공유하고 재생산하는 '정상적인' 유머, 기술, 취미 사이트가 즐비하다.
이처럼 강간문화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일상적 술자리, 강의, 업무, 회의, 친목 모임 속에도 존재한다. '일베' 등을 혐오하는 '괜찮은 남자들' 사이에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