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년의 공부> 조윤제 위즈덤하우스
위즈덤하우스
<이천 년의 공부>는 맹자를 통해 수많은 위기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기르는 법에 대해 이야기 한다. 공자의 <논어>와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좀 더 단단하고 강인한 느낌이다. 쎈 언니의 독설 같았달까. 마음에 남았던 책의 몇 구절을 옮긴다.
하나, 말의 그릇도 본질만큼 중요하다
마음은 따뜻한데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해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굳이 키워드를 꼽는다면 남자, 경상도, 중년이랄까.
예쁘게 말하는 것, 꾸며서 말하는 것을 남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한다.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내 마음이 곧으면 남들이 알아줄 것이라 믿는다. 물론 가장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표현하지 않으면 남들이 알 길은 없다. <이천 년의 공부>에서는 맹자가 양혜왕에게 비유를 통해 설득한 사례가 나온다.
"개나 돼지가 사람 음식을 먹는데도 단속할 줄 모르고, 길에 굶어 죽는 사람이 있어도 곡식을 풀 줄 모르면서 사람이 죽으면 ' 내 탓이 아니라 흉년 탓이다'라고 한다면, 사람을 찔러 죽인 다음에 '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 무기가 죽인 것이다'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맹자는 말의 본질만큼이나 꾸밈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공감 가는 말이다. 밥도 예쁜 그릇에 담아 먹으면 더 먹음직스러워 보이듯, 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둘, 착하기만 해서는 부족하다
"걔가 알고 보면 착한 애인데."
"마음씨는 참 좋은데."
착하다는 말은 요즘 사회에서 더이상 칭찬이 아닌 것 같다. 김영민 교수의 말대로 호구의 동의어거나, 예쁘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때 쓰는 어색한 칭찬이 되어버린 걸까. <이천년의 공부>에서 말하는 맹자는 정치를 할 때 착하기만 해서는 부족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금 인자한 마음이 있고 인자하다는 평판이 있다고 해도 백성들이 그 혜택을 보지 못하고 후세에 본보기가 되지 못하는 것은 좋은 선왕의 도를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옛말에 단지 선한 마음만으로는 좋은 정치를 하기에 부족하고, 좋은 법도가 있어도 저절로 실행될 수는 없다고 했다."
정치뿐 아니라 사회생활에서도 마냥 착하기만 한 것으로는 좋은 말을 듣기 어렵다. 나는 곧잘 착한 사람보다는 일 잘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고 말하곤 한다. 착하고 무능한 팀장 덕에 호되게 고생을 한 덕이다.
얼마 전엔 한참 <왕좌의 게임>에 빠져 있었는데, 최종 주인공 격인 존 스노우의 착하고 고집스러운 면모 때문에 고구마를 백 개 먹은 듯 답답했던 적이 많았다.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단순한 '착함'을 지키기 위해 수만 명의 사람을 희생 시켜야 한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맹자도 <왕좌의 게임>을 함께 봤다면 존 스노우를 욕하지 않았을까. 고전은 고지식한 이야기만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천 년의 공부>를 통해 본 맹자는 달랐다.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보다는 회사 생활을 십 년은 먼저 한 선배와 술자리에서 나누는 이야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