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상모동 생가
박도
박정희와 장택상 두 생가는 경부선 철길 하나 사이로 부르면 대답할 수 있을 정도의 이웃마을이다. 해방 무렵까지만 해도 장택상 전 총리 집안은 영남 제일의 대부호 만석꾼으로 고향 일대에서 남의 땅을 밟지 않고 다닐 정도였다.
장택상은 초등학교 때부터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구치(山口)현에서 소학교를 다녔고, 도쿄 와세다(早稻田) 대학에서 공부하다가 영국 에딘버러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온갖 부귀영화는 다 누렸다.
해방 후 수도경찰청장, 초대 외무부장관,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고향 칠곡에 출마해 이후 5대까지 내리 네 차례나 당선해 국회부의장, 제3대 국무총리 등 대통령직만 빼놓고는 대한민국 정부의 요직은 거의 다 누렸다.
이와 달리 박정희는 출생부터 한 편의 비극 드라마처럼 참담했다. 그 무렵에는 조혼으로 나이 마흔만 넘으면 며느리나 사위를 보고 긴 담뱃대를 물고 노인행세를 하던 때였다. 박정희 어머니 약목 댁은 꽉 찬 나이에 아이를 가져 눈앞이 캄캄했다.
우선 시집간 딸과 함께 해산을 하자니 식구들에게 체통이 서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동네사람들에게 남사스러웠고 더욱이 그때까지 육남매로 여덟 식구가 외가 위토(位土, 묘지에 딸린 논밭) 여덟 마지기 농사를 지어가며 근근이 살아가는데 또 한 입을 더 보탠다는 게 아찔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임신 사실을 안 때부터 뱃속의 아이를 지우고자 온갖 민간요법을 다 써봤다고 전해진다.
박정희 아버지 박성빈은 처가의 위토만으로 도저히 생활이 안 돼 장 직각(장택상 아버지 벼슬이름)댁 땅 다섯 마지기를 소작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소년 박정희는 가을 추수가 끝나면 둘째 무희 형이 지게에다 도지(賭地, 논밭을 빌린 삯)와 마름에게 줄 뇌물 씨암탉을 지고 장 직각 댁으로 가는 것을 보고 자랐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어릴 때 제대로 먹지고 못해 체구도 작은 소작인의 막내아들은 국가최고회의 의장이 되고, 곧 대통령이 됐다. 장택상씨가 볼 때는 천지개벽할 정도로 놀랄 일이었다. 마름의 아들도 아닌, 대면조차 하지 않았던 천한 소작인 아들이 당신이 그렇게 하고 싶던 이 나라 대통령이 됐다니.
장택상의 분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