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젠성 추엔저우에 있는 이탁오의 생가푸젠성 추엔저우에 있는 이탁오의 생가
조창완
대부분의 사람들은 브루노의 학설과 수난은 알아도 이탁오의 사상과 고난은 잘 알지 못한다. 그만큼 지식의 서양편식이 심한 교육의 탓이고, '정통유교'를 비판하는 학문(학자)을 사문난적으로 몰아치는 잘못된 전통 때문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정이지만 조선시대에 유이(?)하게 이탁오의 존재와 그의 저서를 접했던 사람은 『홍길동전』과 「호민론」 등을 쓴 허균과 소현세자가 아닐까 싶다.
허균은 1614년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중국에 다녀왔으며 그 이듬 해에도 연경을 다녀왔다. 두 차례의 사행에서 많은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귀국할 때 『태평광기』를 비록하여 다량의 책을 가져왔다. 그 가운데는 천주교 기도문과 서양지도도 들어있었다.
허균이 마지막으로 중국을 방문했을 때 이탁오는 이미 12년 전에 죽고 없었다. 그렇지만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목사에서 쫓겨나기도 했던 그가 이탁오의 소식을 못들었을 리는 없을 것이다. 허균과 이탁오는 사상과 행적에 있어서 너무나 닮은 데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 한 사람은 병자호란 때에 청국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가 아닐까. 그는 1644년 심양과 북경을 오가면서 독일인 신부 아담 샬(Schall. J. A)과 친교를 맺고 천문, 수학, 천주교 서적과 천주상 등을 접하게 되었다. 9년 동안의 볼모에서 풀려나 귀국할 때에는 서양의 서적은 물론 중국의 많은 책을 가져왔다. 그러나 인조는 세자의 '특이한' 행적을 이유로 죽이고 말았다. 그 역시 중국에서 이탁오의 존재와 저서에 접했을 가능성이 많다. 특이한 행적과 비참한 최후를 생각할 때 더욱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허균과 소현세자를 굳이 이탁오와 '접선'시키려는 데는 까닭이 있다. 성리학과 주자학이 판치는 세상에서 '이단'의 존재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살피기 위해서이다.
이탁오의 파격적인 철학과 행동 중에 두드러진 것의 하나는 당시 유학자들에게는 가히 이단과 대역 또는 반역에 해당하는 혁명적인 사상이었다.
그는 중국을 통일한 진(秦, B․C 255~206) 왕조의 말 혼란기에 "왕후 장상이 어찌 종자가 따로 있겠느냐"면서 만민평등의 기치 아래 중국 최초의 농민반란을 기도한 진승(陳勝)을 '필부수창(匹婦首昌)'이라 부르면서 "옛날에 없었던 일"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반란자를 이렇게 평가하는 사람의 말로는 불을 보듯 뻔하다.
그는 평상시에도 도학자들을 사정없이 비판했다. 도학자에 대한 비판은 곧 체제에 대한 비판이요 도전행위에 속한다. 그런데도 조금도 굽힘없이 도학자들의 무위도식과 공리공담을 질책하고 매도했다.
이탁오는 "지금의 주자학자들은 죽일놈들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도덕을 입에 담고 있으나 마음은 고관에 있고 뜻은 거부(巨富)에 있다. 겉으로는 도학을 한다 하나 속으로는 부귀를 일삼으며 행동은 개, 돼지와 같다"고 극언하면서, 실제로 자신과 일상으로 접촉하는 도학자들에게 이런 비난을 퍼부었다.
이탁오의 기본적인 사상체계는 양명학이었다. 주자학과 양명학은 다같이 봉건철학인 성리학이었지만, 주자학의 결과론에 대해서 양명학은 동기론을 강하게 내세운 것에 차이가 있었다. 그는 양명학으로 개종하면서 차츰 극단적인 경향에 쏠리게 되었다. 양명학의 근본문제를 터득하기 위해서 선종(禪宗)을 가까이 하고 선승과 친교를 맺기도 하였다.
그가 이처럼 사상적인 이단의 길을 걷게 된 데는 가정사의 연고가 다소 작용했을 것같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회교와 가까웠으며 부인 황씨도 회교도 출신인 것으로 전한다. 전통적인 유교사회에서 회교도와 결혼하게 되었던 점 등은 다소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