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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자유사상가 이탁오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 / 30회] 중국과 한국의 도학자들이 이탁오를 두렵게 여겼던 이유

등록 2021.03.31 17:36수정 2021.03.31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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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엔저우 그의 옛집에 있는 초상화 추엔저우 그의 옛집에 있는 초상화
추엔저우 그의 옛집에 있는 초상화추엔저우 그의 옛집에 있는 초상화조창완
 
조선조에서 금서 목록에 이름을 넣은 것까지 두려워 했던 책이 바로 이탁오의 『분서(焚書)』와 『장서(藏書)』이다.

1602년 명나라 정부는 "성인의 가르침을 어기는 도(道)로 대중을 미혹에 빠뜨린다(左道惑衆)"는 유학자들의 탄핵을 받아들여 76세의 이탁오를 감옥에 집어넣었다. '좌도혹중'의 혐의에는 두 책도 원인이 되었다.

중국에서 이럴 때 조선에서는 어땠겠는가. 이탁오의 책은커녕 그의 이름 석자도 알려지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20세기 중국의 대표적 철학자이자 철학사가라는 풍우란(馮友蘭)의 『중국철학자』에도 이탁오는 여전히 금제의 대상이다. 생전에 '주류'로부터 공격과 탄핵을 받았던 그는 사후에도 그의 사상적 계승자라고 볼 수 있는 대표적 사상가 황종희, 고염무, 왕부지 등에게서 조차 이단으로 지목되고 배척받았다.

중국과 한국의 도학자들이 이탁오를 두렵게 여겼던 것은 그의 자유분방한 활동과 유학(도학)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에 있었다.
  
나는 어릴때부터 성인의 가르침이 담긴 책을 읽었지만 성인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몰랐고, 공자를 존중했지만 공자에게 무슨 존중할 만한 것이 있는지 몰랐다. 속담에 이른바 난쟁이가 키 큰 사람들 틈에 끼어 굿거리를 구경하는 것과 같이, 남들이 좋다고 소리치면 그저 따라서 좋다고 소리치는 격이었다. 나이 오십 전까지는 나는 정말 한 마리 개와 같았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어대자 나도 따라 짖어댄 것일 뿐, 왜 그렇게 짖어댓는지 까닭을 묻는다면, 그저 벙어리처럼 아무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유학(자)에 대해 이러한 인식을 갖고 있었던 이탁오가 무사했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우연일까. 서양에서 조르다노 브루노 (1548~1600)가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해 숨지게 되는 시기와 거의 비슷한 무렵에 중국에서는 이탁오(1527~1602)가 자유사상을 제기하며 분방하게 살다가 옥중에서 자살로 삶을 접었다.
  
푸젠성 추엔저우에 있는 이탁오의 생가 푸젠성 추엔저우에 있는 이탁오의 생가
푸젠성 추엔저우에 있는 이탁오의 생가푸젠성 추엔저우에 있는 이탁오의 생가조창완
 
대부분의 사람들은 브루노의 학설과 수난은 알아도 이탁오의 사상과 고난은 잘 알지 못한다. 그만큼 지식의 서양편식이 심한 교육의 탓이고, '정통유교'를 비판하는 학문(학자)을 사문난적으로 몰아치는 잘못된 전통 때문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정이지만 조선시대에 유이(?)하게 이탁오의 존재와 그의 저서를 접했던 사람은 『홍길동전』과 「호민론」 등을 쓴 허균과 소현세자가 아닐까 싶다.

허균은 1614년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중국에 다녀왔으며 그 이듬 해에도 연경을 다녀왔다. 두 차례의 사행에서 많은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귀국할 때 『태평광기』를 비록하여 다량의 책을 가져왔다. 그 가운데는 천주교 기도문과 서양지도도 들어있었다.


허균이 마지막으로 중국을 방문했을 때 이탁오는 이미 12년 전에 죽고 없었다. 그렇지만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목사에서 쫓겨나기도 했던 그가 이탁오의 소식을 못들었을 리는 없을 것이다. 허균과 이탁오는 사상과 행적에 있어서 너무나 닮은 데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 한 사람은 병자호란 때에 청국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가 아닐까. 그는 1644년 심양과 북경을 오가면서 독일인 신부 아담 샬(Schall. J. A)과 친교를 맺고 천문, 수학, 천주교 서적과 천주상 등을 접하게 되었다. 9년 동안의 볼모에서 풀려나 귀국할 때에는 서양의 서적은 물론 중국의 많은 책을 가져왔다. 그러나 인조는 세자의 '특이한' 행적을 이유로 죽이고 말았다. 그 역시 중국에서 이탁오의 존재와 저서에 접했을 가능성이 많다. 특이한 행적과 비참한 최후를 생각할 때 더욱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허균과 소현세자를 굳이 이탁오와 '접선'시키려는 데는 까닭이 있다. 성리학과 주자학이 판치는 세상에서 '이단'의 존재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살피기 위해서이다.

이탁오의 파격적인 철학과 행동 중에 두드러진 것의 하나는 당시 유학자들에게는 가히 이단과 대역 또는 반역에 해당하는 혁명적인 사상이었다.

그는 중국을 통일한 진(秦, B․C 255~206) 왕조의 말 혼란기에 "왕후 장상이 어찌 종자가 따로 있겠느냐"면서 만민평등의 기치 아래 중국 최초의 농민반란을 기도한 진승(陳勝)을 '필부수창(匹婦首昌)'이라 부르면서 "옛날에 없었던 일"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반란자를 이렇게 평가하는 사람의 말로는 불을 보듯 뻔하다.

그는 평상시에도 도학자들을 사정없이 비판했다. 도학자에 대한 비판은 곧 체제에 대한 비판이요 도전행위에 속한다. 그런데도 조금도 굽힘없이 도학자들의 무위도식과 공리공담을 질책하고 매도했다.

이탁오는 "지금의 주자학자들은 죽일놈들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도덕을 입에 담고 있으나 마음은 고관에 있고 뜻은 거부(巨富)에 있다. 겉으로는 도학을 한다 하나 속으로는 부귀를 일삼으며 행동은 개, 돼지와 같다"고 극언하면서, 실제로 자신과 일상으로 접촉하는 도학자들에게 이런 비난을 퍼부었다.

이탁오의 기본적인 사상체계는 양명학이었다. 주자학과 양명학은 다같이 봉건철학인 성리학이었지만, 주자학의 결과론에 대해서 양명학은 동기론을 강하게 내세운 것에 차이가 있었다. 그는 양명학으로 개종하면서 차츰 극단적인 경향에 쏠리게 되었다. 양명학의 근본문제를 터득하기 위해서 선종(禪宗)을 가까이 하고 선승과 친교를 맺기도 하였다.

그가 이처럼 사상적인 이단의 길을 걷게 된 데는 가정사의 연고가 다소 작용했을 것같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회교와 가까웠으며 부인 황씨도 회교도 출신인 것으로 전한다. 전통적인 유교사회에서 회교도와 결혼하게 되었던 점 등은 다소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
  
이탁오가 벼슬을 하던 마지막 땅 윈난성 따리 풍경 이탁오가 벼슬을 하던 마지막 땅 윈난성 따리 풍경
이탁오가 벼슬을 하던 마지막 땅 윈난성 따리 풍경이탁오가 벼슬을 하던 마지막 땅 윈난성 따리 풍경조창완
 
이탁오는 스스로 토로하기를 "어릴 때부터 어기(語氣)가 세어 교화되기가 어려웠고, 도(道)ㆍ불(佛)ㆍ선(仙) 등 어느 것도 믿지 아니하여 도인을 미워하고 승려도 미워하였으며 도학선생은 더욱 싫어하였다"라고 썼다.

그 성격은 편협되고 성급하고, 그 표정은 우쭐하고 자만하고, 그 말투는 천박하고 비속하고, 그 마음은 미친 듯 바보 같은 듯하고, 그 행동은 경솔하고, 교제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누구든 보는 앞에서는 다정하고 따뜻하게 대한다. 다른 사람들과 사귈 때는 단점을 찾기 좋아하고 장점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일단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 사람과 관계를 끊어 버리고, 또한 종신토록 그 사람을 해치려고 한다.

속마음은 따뜻하고 배부른 것을 추구하면서도 스스로 자기는 백이, 숙제라고 하고, 본바탕은 원래 『맹자』에 나오는 제 나라 사람이면서도, 스스로 자기는 도와 덕에 배부르다고 말한다. 분명히 하나도 남에게 주는 것이 없으면서도 유신(有莘:지명, 상나라의 명신 이윤이 탕왕에게 등용되기 전에 농사를 지으며 은거했다는 곳)을 입에 담고, 분명히 털 한오라기도 남을 위해 뽑아주지 않으면서도 양주(楊朱:전국시대의 철학자로서 "설령 내가 털 한오라기를 뽑으면 천하에 이익이 된다 할지라도 나는 뽑아주지 않겠다"고 말한 것으로 유명한 사람)는 인(仁)을 해친다고 한다.
  
베이징 인근 통주에 있는 이탁오 묘. 그는 아이들의 마음을 지순하게 보는 동심설을 주창했다 베이징 인근 통주에 있는 이탁오 묘. 그는 아이들의 마음을 지순하게 보는 동심설을 주창했다
베이징 인근 통주에 있는 이탁오 묘. 그는 아이들의 마음을 지순하게 보는 동심설을 주창했다베이징 인근 통주에 있는 이탁오 묘. 그는 아이들의 마음을 지순하게 보는 동심설을 주창했다조창완
 
걸핏하면 세상 모든 것과 어긋나고, 입에서 나오는 말은 마음 속 생각과 또 다르다. 사람 됨됨이가 이와 같아 마을 사람들이 모두 싫어한다. 옛날에 자공이 스승 공자에게 "마을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아직 나쁘다고 단정하기 곤란하다"고 했는데, 그럼 나 같은 사람은 아직 괜찮단 말인가?

「자찬(自讚)」이란 글에서 스스로를 평가하는 '자화상'이다. 세상의 수많은 회고록 중에서 이처럼 솔직하게 자신의 모습과 생각을 피력하는 내용도 흔치 않을 것이다. 이탁오는 이 글에서 자화상을 그리는 한편 도학자들의 위선을 반어법(反語法)으로 신랄하게 공격한 것이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허균 #허균평전 #자유인_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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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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