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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명득의(保命得意)의 시기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 / 29회] 두 차례의 연경행은 허균에게는 행운의 기회였다

등록 2021.03.30 17:44수정 2021.03.30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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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공원 안 전통 가옥 사랑채에 봉안된 허균 영정 ⓒ 나무위키

 
이이첨의 지원이 있었던지, 1614년 2월에 호조참의로 발탁되었다. 호조(戶曹)란 육조의 하나로 호구ㆍ식량ㆍ세금 등을 관할하는 부서이다. 참의는 정3품 벼슬아치로 판서 아랫 자리에 속하는 감투이다. 

유배자를 갑자기 호조참의로 불러들인 데는 까닭이 있었다.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명나라 황후나 황태자의 탄신을 축하하기 위해 보내는 외교사절이다. 여전히 중요한 임무로서 그의 존재가 필요했을 것이다.

천추사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 그에게 광해군은 이듬해(1615년) 승문원 부제조에 이어 동부승지ㆍ좌부승지ㆍ우승지ㆍ좌승지를 차례로 내리고 윤 8월에는 동지사로 다시 명나라에 보냈다. 동지사는 해마다 동짓달에 중국으로 보내던 특별 사신을 말한다. 짧은 기간에 왕명의 출납을 맡은 정삼품의 당상관 자리를 차례로 차지할 만큼 그는 광해군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이같은 신입으로 동지사가 되고 연달아 두 차례나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당시 명나라는 임진왜란으로 조선에 파병하여 국운이 크게 기울고 있었지만 아직 잔명이 남아 있었고, 조선왕조로서는 유일하게 기대는 보호국이었다. 해서 동지사나 천추사의 위상은 그만큼 막중하고 국왕의 신임이 따랐다. 이즈음 허균은 이른바 목숨을 보존하고 뜻을 얻는 '보명득의(保命得意)'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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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엔저우 그의 옛집에 있는 초상화 추엔저우 그의 옛집에 있는 초상화 ⓒ 조창완

 
두 차례의 연경행은 그에게는 행운의 기회였다. 앞서도 연경을 다녀온 바 있었으나, 그때는 수행원에 불과했지만 이번 길은 우두머리가 되어서 얼마든지 뜻을 펼 수 있는 기회였다. 또 만나고 싶은 사람, 사고 싶은 서책을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당시 연경은 서양 천주교인이 자리잡고, 각종 서양 문물이 도입되어서 새로운 학문에 목말라하던 그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이 인식되었을 터이다. 

허균이 연경행에서 얻은 두 가지 큰 수확이 있었다. 하나는 중국에서 '유교의 반도(叛徒)'라 불리는 이지(李贄, 1527~1602)와 만나거나 그의 저서를 입수하여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본명보다 이탁오(李卓吾)라는 호로 더 알려진 이 사람은 "공자의 천하, 중국을 뒤흔든 자유인"으로 허균과 비슷한 성향의 이단적 사상가이다. 허균이 처음으로 중국을 갔을 때 1597년(선조 37)는 이탁오가 아직 살아 있어서 그와 만났을 개연성도 없지 않다.

허균의 가장 중요한 저서로서 우리나라의 대표적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이 불의에 대항할 정의로운 싸움과, 내면적으로 차별을 받는 여성의 문제를 다루었던 것은 아마도 이탁오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1602년 76세로 이탁오가 탄핵을 받아 옥중에서 자결했을 때, 그에 대한 죄상 가운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 바로 시대를 뛰어넘는 진보적 여성관이나 여성들과의 교류와 남녀공학에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허균도 유교적 사회제도의 축첩제도와 적자와 서자의 차별 문제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여성의 억울함을 고발하여 사회화하였다고 볼 수 있다. (주석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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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인근 통주에 있는 이탁오 묘. 그는 아이들의 마음을 지순하게 보는 동심설을 주창했다 베이징 인근 통주에 있는 이탁오 묘. 그는 아이들의 마음을 지순하게 보는 동심설을 주창했다 ⓒ 조창완

 
그는 1615년 11월 연경 통주에서 이탁오의 『분서』를 읽고 시를 지었다. 
  
이탁오의 '분서'를 읽고


 맑은 조저에서 독옹(이탁오의 호)의 책 불살랐지만
 그 도는 불타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네.
 불교든 유교든 깨달음은 한가지거늘
 세상에선 이 말 저 말 분분키도 하군.

 구후(통구에서 만난 인물)가 나를 맞아 손님으로 예우하여
 기린 봉황처럼 빼어난 인물들 직접 보았네.
 저물어 이탁오에 대한 인물론(人物論) 읽고
 비로소 먼저 책 속의 사람이 된 걸 알았네.

 내가 이탁오의 이름을 진작에 알았더라면
 참선으로 평생을 마치고자 했을 텐데
 내 책 아직 분서당하지 않았으니
 세 번 탄핵받은 것쯤이야 유쾌한 일일세. (주석 5)


주석
4> 신용철, 『이탁오』, 385쪽, 지식산업사, 2006.
5> 정길수, 앞의 책, 82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허균 #허균평전 #자유인_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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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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