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들의 유품 전시트럭에 실려 학살장소로 끌려오던 희생자들이 죽음을 직감하고 가족들에게 장소를 알리기 위해 내던진 검정고무신과 소지품들을 재현해 놓았다.
황의봉
불법적인 학살사건이 자행된 후의 상황은 어떻게 전개됐을까. 불법주륙기 옆에 '65년 고난의 약사'가 적혀 있다. 학살 현장을 은폐하고 유족들의 접근을 봉쇄한 당국의 조치로 인해 유족들이 시신을 발굴한 것은 사건 발생 6년 뒤인 1956년이었다.
4·19혁명이 있고서야 비로소 국회에서 양민학살 진상조사 결의안이 통과됐다. 그러나 다음 해 5·16쿠데타가 발발하자 진상규명은 없었던 일이 되고, 겨우 조성한 희생자 묘역 위령비도 경찰 주도로 파괴해버렸다. 유족들에게 다시 암흑기가 시작됐다.
이후 30여 년의 세월이 흘러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에 이르러서야 백조일손유족회가 창립되고, 위령비가 세워졌고, 유족들의 진상규명 활동이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40여 년이나 쉬쉬하며 감춰오던 학살 만행이 비로소 '봉인 해제'된 것이다.
악의 평범성
섯알오름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마음이 얼어붙었다. 권력이 뭐길래, 이념이 뭐길래 원시 시대에도 없었을 야만의 극한을 감행할 수 있었을까. 검속, 학살에 가담한 경찰과 군인은 아무리 명령에 움직였다고 해도 그게 인간으로서 가능한 일이었을까. 만행을 기획한 자나 명령한 자, 집행한 자도 집에 가면 모두 자상한 가장이요, 소중한 자식일 텐데.
미국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뉴요커> 잡지의 특파원으로 2차 대전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취재한 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을 제시해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던져주었다.
아이히만이 유대인 말살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은 그의 타고난 악마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고력의 결여' 때문이었다고 한나 아렌트는 분석했다.
이 '악의 평범성'이 우리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인가. 그래서 빨갱이로 의심되는 자들이니 구덩이에 처넣고 무차별로 죽이라는 명령을 따랐던 것일까.
하늘빛 오름회에서 섯알오름을 다녀온 지 일주일이 지난 오늘 혼자 집을 나섰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해 묘역을 조성했다는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를 가야만 할 것 같았다. 무더기로 암매장돼 누구의 시신인지도 구분할 수 없어 한군데에 모시고 '백 할아버지에 한 자손'이라는 뜻으로 이름이 붙은 합동 묘지다.
내비게이션을 치고 안덕면 사계리 쪽으로 가다 보니 주변이 온통 밭이다. 안내판이 보였다. 백조일손묘역 400m, 학살 터 3.8㎞라고 쓰여 있다. 곧 묘역에 도착했다. 안내판부터 읽어봤다.
이곳은 1950년대 모슬포 경찰서 관내(현재 한림읍, 대정읍, 한경면, 안덕면)에 거주하던 순박한 농민, 마을유지, 교육자, 공무원, 청년단체장, 학생 등을 6·25전쟁이 발발하자 군·경의 자의적 판단에 근거하여 구금되었던 양민이 사법적 절차 없이 정부군에 의하여 무참히 학살당한 일백서른두 위의 원혼이 영면하신 곳입니다.
묘역은 잘 단장되어 있었다. 백조일손영령 위령비가 가운데 세워져 있고, 그 뒤의 넓은 평지에 132위의 나지막한 봉분이 열을 지어 나란히 조성돼 있었다.
유족들이 사건 발생 6년 만에 유해를 발굴할 수 있었는데, 도저히 누가 누군지 구분이 안 돼 132개의 칠성판 위에 두개골 하나에 등뼈, 팔·다리뼈들을 적당히 맞추어 132구로 구성하였다는 것이다. 해마다 7월 칠석날 아침에 유족들이 합동으로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묘역의 맨 뒤 중앙에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고 그 뒤로 산방산이 보였다. 또 위령비 위에도 묵직한 돌에 태극기를 새겨 올려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국가 공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을 국가를 상징하는 태극기가 묘역의 앞뒤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형국이다. 기분이 묘했다.
백조일손지지 답사를 마치고 돌아 나오는 길, 산방산과 단산이 보였다. (20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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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봄 제주로 이주했다.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 그리고 제주현대사의 아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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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여기서 죽었다'... 죽은 자가 던진 검정고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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