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인성의 내부 모습처인성의 내부는 협소한 편으로 전투 당시에는 100명의 승군과 부곡민 밖에 없었다고 한다.
운민
최우를 중심으로 한 고려 조정은 장기전을 대비하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했고, 분노한 몽골은 살리타이를 앞세워 침입했다. 이번의 기세는 더욱 매서웠다. 재빠르게 서경(평양), 남경(서울)을 함락한 몽골은 개경 조정에게 항복을 권고했지만 강화해협의 빠른 물살에 의지한 고려는 결코 항복하지 않았다.
수전에 약한 몽골군은 일단 한반도를 초토화시키기로 결심한다. 그 공격 대상 중의 하나가 용인에 위치한 처인 부곡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일명 향, 소, 부곡(鄕所部曲)이라 해서 광업과 수공업에 종사한 천민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 그들은 조세와 노역의 부담도 훨씬 컸고, 거주 이전의 자유도 없었다.
살리타이는 용인 구성동에 위치한 용구 현성을 무혈입성하여 함락시켰고, 눈앞에 보이는 것은 둘레 425미터도 채 되지 않은 작은 토성, 처인성이다. 성안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은 정규병력 100여 명, 승려 100명, 그리고 다수의 부곡민뿐이었다.
이런 작은 성을 굳이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살리타이는 정작 용인 본성에서는 허탕을 쳤고 처인성에 군량이 있다는 정보를 받자마자 나름 분풀이 대상으로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살리타이는 처인성에 도달하자마자 본대에서 500기의 기병들을 직접 데리고 처인성 주변을 점령해 포위 공격에 들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