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생부모로 알고 있었던 첫 국내입양가정에서. 양모가 자살하고 고아원에 가기 전 동네에서 아이들과 재미있게 어울려 놀던 시절이다.
에이릭하게네스
종로에 있던 고아원 담벼락을 뛰어넘어 마포 집으로 도망쳤다. 벌써 재혼해 살고 있던 아버지는 그를 다시 고아원으로 넘겼다. 지금도 잔상으로 남은 생애 가장 어두운 6개월이다.
입양 가는 줄 알고 있었다. 노르웨이라는 낯선 나라에서 과자와 사진이 든 소포가 오고 있었다. 좋았다. 설레게 기다렸다. 고아원만 아니라면 어디든 관계없었다. 아빠는 그에 대한 친권을 포기했고 해외입양 동의서에 사인했다.
'이동헌'에서 '에이릭 하게네스'로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차로 8시간을 달려야 하는 곳이었다. 도착한 집에서 첫날 밤을 보내고 일어나 창가에 섰을 때 거대한 풍경이 그를 압도했다. 창문 너머로 바다에서 수직으로 솟아오른 거대한 산줄기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다. 피오르였다.
그가 꺼낸 첫마디가 '한강'이었다고 훗날 양부가 전해주었다. 1989년 그의 나이 7살이었다. 한국에서 이동헌이었던 그의 이름은 에이릭 하게네스가 되었다. 그가 살던 송내피오르는 인구가 2000여 명 정도의 작은 타운이었다.
보수적인 성격의 양부는 엔지니어였고 개방적이고 따뜻한 성품의 양모는 헤어드레서(미용사)로 일하고 있었다. 위로 8살 많은 형이 있었다. 형도 18개월 때 양부모가 한국에서 입양했다. 두 분은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가 가고 2년 뒤 성격 차이가 확연했던 두 분은 이혼했다. 그는 엄마와 형은 아빠와 살기 시작했다. 이혼은 엄마와 아빠, 두 사람의 감정이었고 관계였기에 그는 가까이 있는 두 집을 오가며 가족들과 관계를 이어나갔다. 특히 같은 한국 입양인 출신이었던 형은 그에게 각별한 사람이었다.
노르웨이라고 아이들과 노는 게 달라질 건 없었다. 서울에서 고아원에 가기 전에 동네 아이들과 어울렸던 것처럼 그곳에서도 매일 밖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지금 생각해도 행복했던 시절이다. 백인사회에 유일한 아시안이어서 차별을 받는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그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질 만한 수준의 놀림이어서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는 학생이었다. 특히 축구는 발군의 실력으로 지역 내셔널 팀에 소속될 수준이었다. 한국에서 불행했던 기억이 완전히 지워지진 않았지만 그걸 떠올릴 겨를이 없을 만큼 행복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행복은 열네 살에 멈췄다.
형이 죽었다. 혼자 자동차를 운전하며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피오르 길을 지나다 절벽으로 떨어졌다. 스물 두 살이었던 형은 건축일을 하고 있었다. 나이 차가 있어 일상을 공유하진 못했지만 가장 가까웠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형의 죽음이 준 충격은 강렬했고 강력했다. 그는 우울과 절망에 빠져 무기력한 사람으로 변했다.
하루아침에 삶의 목표가 사라져버렸다. 운동을 그만두었고 공부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고등학교 진학을 하면서 집에서 독립했다. 노르웨이에서는 흔한 일이다. 독립은 부모로부터의 경제적 지원도 받지 않는다는 의미다. 학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하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여전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목표 따위는 없었다. 그저 흐르는 시간을 따라갈 뿐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바로 진학했다. 이번에는 집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기술을 배우면서 바로 돈을 벌 수 있었지만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