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령비오창 창고 현장 주변에 세워진 위령비
박만순
쌀 열 짝을 빼앗겨
진천면 상계리 신순철(1931년생)은 사석지서 김재옥, 나세찬 순경이 마을로 와 '아군을 위해 방공호를 파야 하니 삽과 괭이를 들고 지서로 오라'고 해, 동네 사람 30여 명과 함께 지서로 향했다.
신순철은 대한청년단 진천면 상계리 반장을 맡고 있었다. 동시에 보도연맹원이기도 했다. 그는 사실 좌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같은 마을 청년들이 "여기에 도장을 찍지 않으면 품앗이가 일절 없을 줄 알아"라고 겁박해 민애청에 가입했다. 이 일로 인해 진천경찰서에서 며칠간 조사를 받은 그는 후일 국민보도연맹이 만들어지면서 자동으로 연맹원이 되었다.
전쟁 발발 후 방공호를 판다는 명분으로 마을 주민들이 사석지서로 소집되었을 때, 보도연맹원에 대한 심사, 분류가 있었다. 그는 평소의 활동과 대한청년단 상계리 반장이라는 직책이 감안돼 방앗간에 구금되지 않았다. 다음날 그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1950년 가을 사석지서 김아무개 순경과 군인들이 그의 집에 들이닥쳐 소 한 마리와 쌀 열 짝을 빼앗아 갔다. 보도연맹원이었다는 이유로 말이다.
또한 신순철이 군에서 총기 오발 사고를 냈는데 상급자들은 그를 사상범으로 몰았다. 특별 휴가 한 달이 있었는데 취소되었고, 군 복무기간은 한정 없이 늘어져 6년 만에야 제대할 수 있었다.
1958년도에 진천경찰서에 갔는데 수사과장 책상 고무판 아래에 보도연맹원 명단이 있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충북대책위원회, 기억여행, 2006) 국민보도연맹원은 '같은 국민으로서 보호해 주는 것'이 아닌 영원한 주홍 글씨에 불과함을 실감했다.
밥 많이 먹는다고 구박해
남편 박원종을 잃은 공기순에게 인공시절은 또 하나의 지옥이었다. 인민군이 점령하던 시절, 진천면 문봉리 용소마을(용소백이) 김민정(가명)은 집마다 방문하여 여성들에게 여맹(여성동맹)에 가입하라고 했다.
1차 가입 대상은 한국전쟁 초기 보도연맹 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여성들이었다. 그렇기에 공기순도 여러 차례 김민정의 방문을 받아야 했다. 김민정은 자위대원들과 함께 들이닥쳤다.
공기순이 가족들을 데리고 뒷산으로 피신해 있던 날, 김민정은 공기순 집의 장독대를 부수고 죽창으로 가재도구를 쑤셨다. 김민정은 비단 공기순 집에만 들이닥친 것이 아니라 마을 여러 집을 다니며 행패를 부렸다.
인공시절,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의한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용소마을 주민들은 인공시절이 유쾌하지 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군경 수복 후 김민정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받았다. 후유증으로 김민정은 오래 살지 못했다.
박찬영은 어릴 때 그리 어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 진천면에서 부유하기로 소문난 외삼촌의 존재 때문이었었다. 소 장사를 하던 외삼촌 공덕근은 진천면에서 부유하게 살았기에 한 살 때 아버지를 잃은 조카와 남편을 잃은 여동생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특히 조카 박찬영이 진천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자기 집에서 생활하게 했다. 하지만 외삼촌의 아낌없는 사랑과 달리 외숙모의 태도는 냉랭하기만 했다.
"왜 이렇게 밥을 많이 먹냐"고 구박받은 날 소년 박찬영은 밥상머리에서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아무 말 없이 일어난 소년은 책가방을 들고 시골인 문봉리 용소마을로 무작정 걸었다. 4km 넘는 길을 걷는데 비는 추적추적 내렸다. 그 비를 다 맞고 3일을 앓아누웠다. 아버지 없는 설움은 소년 박찬영에게 평생의 아픔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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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 더미 속, 아비는 발가락만 보고 아들의 시신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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