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석지서이순희가 고문을 당했던 사석지서(현 진천 사석파출소)
박만순
오창 양곡창고에서 탈출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집으로 돌아온 김재현(1925년생. 충북 진천군 진천면 문봉리)은 군경이 수복한 후 사석지서장의 호출을 받아 악역을 맡아야 했다.
6.25 직후 진천 할미성에서 사석지서 경찰들에게 죽임을 당한 홍백학의 아내 이순희를 붙잡아 오라는 것이다. 홍백학이야 민애청 활동을 주도적으로 해 할미성에서 죽었다고 하지만, 그의 아내는 좌익활동을 한 일이 전혀 없었다.
밑도 끝도 없이 잡아 오라는 요구에 김재현은 사석지서에서 붙여준 한 명과 함께 경기도 안성방향의 입장인 이순희 친정집을 향했다. 김재현은 일제강점기에 함경남도 흥남에 장사하러 다닐 때 홍백학의 처가집을 멀리서 본 적이 있었다.
더군다나 사석지서에서는 1950년 9월 말 관내의 부역자들을 붙잡아 들이느라 인력이 부족했기에 자신들이 직접 그녀를 검거하지 않고 김재현에게 악역을 맡겼다.
사석지서장은 '이순희를 붙잡아 오면 너는 살려주고, 그렇지 않으면 너가 죽을 줄 알어!'라고 겁박을 했다. 이순희도 죄가 없지만 자신도 오창창고에서 살아나온 죄밖에 없었다. 그런 협박을 받고 보니 황당했지만 김재현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사석에서 입장까지 걸어서 8시간이 걸렸다. 기진맥진한 그는 어렵지 않게 이순희의 친정집을 찾을 수 있었다.
김재현은 충남 천안군 입장에서 이순희와 다른 한 명을 데리고 오다가 지그머리라는 마을에서 자게 되었는데, 한 명이 도망을 갔다. 그러자 이순희도 그에게 사석에 가기 싫다고 했다.
"당신이 안 가면 내가 백곡저수지에 빠져 죽을 수밖에..."
그녀가 다른 이의 형편을 봐줄 상황이 아니었지만, 같은 마을의 남정네가 그렇게 얘기하니 안 돼 보였다. 김재현은 이순희를 진천 사석지서로 데려갔다. 그러나 그는 심부름을 제대로 못 했다고 지서에서 매를 맞았다.(충북대책위원회, 기억여행, 2006)
물고문과 형무소
"남편 어디 갔어?"
이순희는 기가 막혔다. 6.25가 나자마자 남편을 붙잡아 간 당사자들이 적반하장격으로 남편을 '내놓으라'니 말도 나오지 않았다. 사실 그녀의 남편 홍백학은 이미 1950년 6월 30일 진천군 진천면 할미성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렇다면 홍백학을 죽인 사석지서 경찰들은 왜 그의 아내에게 남편 행적을 취조했을까? 그것은 자신들의 죄를 은폐시킴과 동시에 이순희에게 빨갱이 가족이라는 올가미를 씌우기 위함이었다.
사실 인공시절 집 울타리를 넘어본 적 없는 이순희가 부역혐의로 취조를 받을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남편의 행적을 대라는 어처구니없는 고초를 당했다.
이순희의 입에서 아무런 답변이 없자 경찰들은 물고문을 가했다. 그녀를 나무 의자에 꽁꽁 묶은 후 얼굴을 젖히더니 그 위에 수건을 덮었다. 그런 후에 주전자로 물을 부었다. 그녀는 숨을 꾹 참았다. 하지만 경찰 둘이 달라붙어 한 명은 입을 벌리고 얼굴을 못 움직이게 붙잡았다.
다른 한 명은 그녀의 입과 코에 주전자를 들이댔다. 잠시 후 그녀는 켁켁거리더니 의식을 잃었다. 경찰들은 당황하기는커녕 낄낄거렸다. 이미 이전부터 많이 해본 솜씨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경찰 밑에서 보조 순사로 일하면서 조선인들을 고문하는 데 심부름을 했고, 해방 후에는 빨갱이 때려잡는다고 주민들을 붙잡아다가 물고문, 전기고문을 해본 유경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죄가 있어 이순희를 붙잡아 들인 것이 아니기에 그녀는 며칠간 사석지서 유치장 신세를 진 후 풀려났다. 그런데 그녀는 툭하면 사석지서에 불려갔다. 마치 동네북처럼 나라에 무슨 일만 생기면 사석지서에 끌려가 시달림을 당했다.
1957년도에는 청주형무소에 구속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녀는 무남독녀 홍이숙(1946년생)을 남겨 둔 채 만 4년간의 감옥살이를 했다. 홍이숙은 당시 국민학교 5학년에 불과했다. 수 차례 지서에 연행돼 조사를 받았어도 아무런 혐의가 없는 것으로 나왔는데, 뜬금없이 감옥생활을 한 것이다.
1960년 4.19혁명 후 특별사면으로 이순희는 석방되었다. 석방 후 딸을 데리고 개가한 그녀는 고문 후유증으로 몇 년 후에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홍이숙은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 김재현은 이숙희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평생 간직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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