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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똥 먹고 시체 피 마셔... 살기 위한 이들의 몸부림

민간인 400명에 무차별하게 당겨진 권총 방아쇠, 오창 양곡창고 학살사건

등록 2023.09.21 11:37수정 2023.09.21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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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 학살지도 오창 양곡창고에서의 학살정황을 재구성 ⓒ 박만순

 
오창지서에서 간단하게 신분 확인을 마친 김창석(1929년생, 오창면 각리)은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오창면 각 마을에서 소집된 보도연맹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바닥에는 말할 것도 없고 벼 가마 위에도 사람이 앉아 있는 등 산만하기 그지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창고 안의 사람들은 특별한 근심 걱정이 없는 표정이었다.

경찰들의 지시로 벼 가마를 양쪽 벽체에 쌓아 놓고 자유롭게 담소를 나눈 첫날은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특히 김창석은 지서 순경들과 안면이 있어 대소변을 볼 때 지서와 창고를 자유롭게 오갔다. 식사는 일부 구금된 이들의 가족이 가져온 것을 경찰들이 전해주었다.

진천 쪽에서 가끔 포 소리가 났으나 그것이 인민군이 잣고개까지 와 있는 것으로는 상상할 수 없었다. 군인들의 동태가 궁금하긴 했지만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낮에는 창고 문을 열어 놓기도 했던 평화스러웠던 그날은 1950년 7월 8일이었다.

다음 날인 7월 9일의 공기는 전날과 전혀 달랐다. 오전에는 진천 사석에서 GMC 트럭 3대에 실려 온 보도연맹원 약 70~100명이 창고에 구금되었고, 점심부터는 헌병이 구금자들을 마을별로 불러내 전쟁 전 활동을 조사했다.

무차별 구타의 시작
 

이런 와중에 물심부름을 하다 도망친 이가 있었다. 오창면 구룡리 김병현(1929년생)은 창고에 구금된 후 물심부름을 했다. 군인들은 구금자들을 창고 문을 기준으로 4개 반으로 편성했는데, 그는 4반 반장이 되었다. 밖에서 물 떠오라는 지시로 나갔다가 군인이 소변보는 틈을 이용해 달아났다. 창고가 완전히 통제되기 전인 7월 9일 오전이었다.

하지만 7월 9일 오후부터는 창고의 경계를 군인이 맡으면서 공기가 한결 험악해졌다. 창고 옆의 변소(화장실)를 이용하는 것이 제한되었고, 가족들이 가져온 식사도 가마니에 담아 한꺼번에 전해주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부 구금자는 함석과 송판으로 된 창고 벽을 발로 차 깨뜨려 도망가기도 했다.(진실화해위원회, 청원 오창창고 보도연맹 사건, 2007)

군인들의 가혹행위가 시작되었다. 군인 2~3명이 들어와 짧은 머리를 한 청년들을 무차별 구타했다. 김창석의 증언이다.

"군인들이 총 개머리판으로 때리며 저희를 향해 공산패라고 했습니다. 특히 머리 짧은 사람하고 상투 달린 사람들을 많이 팼습니다. 그 후 쇠로 창을 만들어 옆구리를 쑤시고 하여 몸에서 피도 나고 총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때리는 등 엄청 많이 때렸어요."

이 과정에서 오창면 유리 임호연의 정강이가 부러졌다. 군인들의 이런 행동은 어떤 증거나 조사를 토대로 한 것이 아니라 다분히 감정적이었다. 군인들의 가혹행위가 4~5차례 이어지자 오창 출신의 헌병이 들어와 군인들을 제지했다.

가혹행위를 한 군인들은 물러 났지만 창고에 구금된 이들의 활동은 한층 통제되었다. 군인들은 창고 문을 완전히 잠그고, 똥장군(대소변통) 2개와 양철 물통 2개를 창고 안으로 들여놓았다.

창고 안은 400명의 땀 냄새와 그들이 배출해 낸 오물 냄새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앉아만 있어도 저절로 땀이 주르륵 흘렀고 손으로 코를 쥐어야만 했다. 하지만 다음날의 상황 전개에 비하면 이날은 양반이었다.

도망치는 자는 이렇게 된다

"군인 가족은 앞으로 나와!"

눈에 살기를 한 군인의 고함이었다. '드디어 살아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한 오창면 신평리 오만기·오성기 형제는 앞으로 나갔다. 오창면 전태준 역시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사며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그것이 부러움을 살 일이 아니라는 것은 금방 확인되었다.

창고 출입구 앞에 서 있던 군인은 "네 동생하고 싸우려고 빨갱이 짓을 했냐"며 오만기·오성기 형제와 전태준을 총 개머리판으로 죽도록 패다가 카빈총 방아쇠를 당겼다. 오창 양곡창고 최초의 희생자가 나온 순간은 7월 10일 저녁이었다.

피의 제전(祭典)은 이어졌다.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30일 충청북도 경찰국의 지시로 1차 예비검속된 이들이 그 희생양이었다. 오창지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던 박승하 등 15명이 지서 안 창고로 끌려갔다. 어떠한 조사나 절차도 없이 군 장교의 손에 들려있던 권총 방아쇠가 당겨졌다. 탄환 15발이 발사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곧이어 헌병이 이만우(오창면 여천리)를 불러냈다. 헌병이 이만우를 보도연맹 간부로 인식한 듯했다. 그러자 이만우는 갑자기 도망치기 시작했고 창고 인근의 가정집 돼지우리에 숨어 있던 그를 헌병이 붙잡아왔다.

헌병들은 창고 안에 있던 보도연맹원들을 모두 창고 밖으로 나오게 한 뒤 "도망치는 자는 이렇게 된다"며 창고와 지서 사이의 신작로에서 이만우를 공개 처형했다.

1950년 6월 30일, 권총이 불을 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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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미성 학살지도 진천 할미성에서의 학살정황을 재구성 ⓒ 박만순

  
이렇게 오창에서 20명 가까이 학살되는 동안 진천에서는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1950년 6월 30일의 1차 예비검속으로 사석지서에 구금되었던 신창교, 홍백학, 오수정, 김임준, 백낙천 등 10여 명은 지서에서 6km 떨어진 진천읍 성석리 할미성(대모산성)으로 이송되었다.

고구려 침입에 대비해 백제시대에 쌓은 토성인 할미성은 해발 100미터에 불과하지만 이월, 덕산 방향에서 침공하는 외적에 대비하기 위한 천연의 요새였다. 평화로운 시기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이곳에 10여 명의 보도연맹원이 광목천으로 굴비처럼 묶여 끌려왔다. 아무런 절차와 통고 없이 권총 방아쇠가 당겨졌다. 오창 양곡창고의 1차 학살보다 10일 빠른 1950년 6월 30일이었다.

그렇다면 오창지서와 진천 할미성에서 죽임을 당한 이들은 누구인가? 오창면 성산리 박승하는 오창면 좌익활동의 최고지도자로 민애청(민주애국청년동맹) 오창면 책임자인 것으로 알려졌다.

박승하와 함께 1차로 학살된 이들은 민애청 각 마을 책임자였다. 보도연맹이 만들어지면서 예전 민애청 간부들이 보도연맹 간부로 그대로 등용되었다. 즉 보도연맹 간부들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진천 할미성으로 끌려간 이들도 진천읍 사석리와 문봉리 등지에서 활동한 민애청과 국민보도연맹 주요 간부였다. 보도연맹 진천면(현재의 진천읍) 책임자였던 김임준과 진천면 문봉리 홍백학과 백낙천, 상계리의 신창교 등이 죽음의 골짜기로 간 것이다.

그 자리에서 신창교, 홍백학, 오수정 등 10여 명이 즉사했고 백낙천은 총 7발을 맞았으나 구사일생으로 집으로 귀환했다. 김임준은 학살 과정에서 탈출해 인공 시절 진천면 인민위원장을 맡았다.

오창지서와 진천 할미성에서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들이 민애청과 국민보도연맹의 주요 간부였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들이 보도연맹 주요 간부라는 이유만으로 학살당한 것은 정당한 것일까?

국민보도연맹은 대한민국에 충성을 서약한 반공단체였다. 과거의 활동이 어떠했든 국가에 충성을 서약한 이들을 아무런 절차 없이 학살한 것은 전쟁범죄가 아닐 수 없다.

군사작전 치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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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미성 현장 할미성 현장에 선 유족 서은석 ⓒ 박만순

  
7월 10일 밤 오창지서 경찰과 보도연맹원 심사 및 구금을 총괄 지휘한 국군 6사단 19연대 헌병대는 창고 문을 잠근 채 후퇴했다. 원래는 그들이 후퇴하기 직전 보도연맹원들을 전부 처형하려고 했는데 지역 유지들의 탄원으로 창고 문만 잠근 채 후퇴한 것이라 한다. 당시 오창 의용소방대원 김수철의 증언이다.

오창 각 지역 마을 유지들이 오창지서로 와서 "주동자급은 이미 사살했고, 창고 안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도장만 찍은 자들이니 죽일 필요가 없지 않느냐"라고 설득했으며, 이에 따라 헌병 및 경찰은 구금자 사살을 포기하고 후퇴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헌병들은 구금자들을 갑자기 풀어 줄 경우 난동을 피울 수 있다고 보고 열쇠를 의용소방대원 또는 오창지서장에게 맡기고 창고 문을 잠근 채 후퇴했다(청주기독교방송 인터뷰, 1994)

그런데 문제는 11일 새벽 4시경에 발생했다. 진천 잣고개에서 인민군에 패배하고 후퇴하는 수도사단 군인들이 오창 양곡창고를 지나가게 된 것이다. 창고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자 '당신들은 뭐야'라는 물음에 "보도연맹원입니다"라는 답이 되돌아왔다.

창고 문을 총 개머리판으로 부순 군 장교는 부하들에게 창고의 정·후문 출입구에 기관총을 설치하게 했다. 굶주림과 악취, 피곤함에 축 늘어진 800개의 눈동자가 불안에 떨기 시작했을 때 기관총 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창고 안의 똥장군이 박살 났다.

'악', '억'하는 소리와 동시에 짚단 쓰러지듯이 사방에서 보도연맹원들이 쓰러졌다. 곧이어 소총의 집중사격이 이어졌고 급기야 수류탄이 던져졌다. 군인들은 창고에 구금된 400명의 비무장 민간인을 상대로 마치 군사작전을 치르듯이 했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하늘이 도운 것이다.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면 살려 주겠다." 저 말에 거짓말 대잔치(?)가 벌어졌다. 순진하게 그 말을 믿은 이들은 잠시 후 가슴과 머리에서 피를 쏟아내야만 했다.

거짓말 대잔치는 두 차례 진행되었고, 그 와중에 일부 보도연맹원이 창고 뒷문을 박차고 탈출을 했다. 군인들은 창고 안과 인근의 민가들을 다니며 확인 사살을 했다.

92명의 생존자
 

지옥의 아수라장(阿修羅場) 같은 그곳에서도 삶의 의지가 분출했다. 오창면 양청리 유창혁(1926년생)은 총소리와 동시에 엎드렸다. 사격이 끝난 얼마 후에 장대리 아주머니에게 물을 달라고 해 논물을 먹었다. 바로 일어날 수가 없어 시신 밑에 숨어 있다가 현장을 벗어났다.

진천면 문봉리 김재현(1925년생)은 구금 중에 밥을 날라주는 가족이 없어 쫄쫄 굶다가 자신의 오줌을 받아먹었는데, 오줌 색깔이 빨갰다. 탈출 과정에서 민가의 똥장군에 빠져 남의 똥을 먹어야만 했다.

오창면 유리 임만호(1916년생)는 "저는 그때 시체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며, 목이 몹시 말라 죽은 사람의 허벅지에서 나오는 피를 먹기도 했습니다"라고 당시의 상황을 생전에 증언했다.

오창면 기암리 김복흥(1919년생)이 창고를 빠져나와 같은 마을 장인식과 함께 도랑을 통해 목령산 쪽으로 가서 숨었는데, 갑자기 쾅 하는 소리를 들었다. 순간적으로 땅바닥에 바짝 엎드린 김복흥 일행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보니 양곡창고가 폭격을 맞은 상태였다. 1950년 7월 11일 오전 8시 30분 경이었다.

이는 충청북도와 제37사단이 공동으로 펴낸 <충북지역전사>의 내용과 동일하다. 위 책에서는 1950년 7월 11일 08:30부터 F-51전투기 2개 편대(8대)가 오창 및 미호천 일대에 공중공격을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구사일생으로 죽음의 창고에서 살아난 이들은 92명이었다.
#오창 양곡창고 #국민보도연맹 #헌병 #생존자 #할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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