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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한 그날, 운명을 바꾼 경찰서장의 전화 한 통

인민군 서울 점령, 그 이후에 벌어진 일... 진천·청원 오창 보도연맹원 예비검속 전말

등록 2023.09.12 09:33수정 2023.09.18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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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면 보도연맹원 소집경로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참조 ⓒ 박만순


한여름 매미 울음처럼 전화벨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마침 지서 밖에서 의용소방대원에게 일을 지시하던 사석지서 오병수(가명) 지서장이 뒤늦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왜 이렇게 전활 늦게 받아."


호통친 이는 충북 진천경찰서장이었다. 10여 분이나 지났을까, 전화로 내려 온 지시사항을 받아적은 김재옥은 지서장에게 내밀었다. '보도연맹 명단을 즉시 보고 하라'는 전통(전언통신문)을 쳐다보는 오지서장은 황망하기만 했다. 그날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이었다.

3일 후인 6월 28일 새로운 무선통신과 더불어 전화로 지시사항이 떨어졌다. 충청북도 경찰국의 지시라며 '각 지역 보도연맹원들을 일정 지역으로 소집시키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지서장과 김재옥 순경은 눈치챘지만 누구도 입을 열 수는 없었다. (청주기독교방송 인터뷰, 1994)

진천지서에서는 관내 요시찰인과 국민보도연맹 핵심 간부들을 붙잡아 들였다. 진천면 문봉리 홍백학과 백낙천, 상계리의 김임준이 그들이다. 김임준은 민주애국청년동맹(민애청) 진천면 책임자였다. 홍백학을 포함한 약 10명은 6월 30일 사석지서 유치장에 구금됐다. 

청원군(현재의 청주시) 오창지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충북도경의 지시를 받은 청주경찰서(서장 : 박용해)는 관할지역인 청주시·청원군 관내 지서에 예비검속자와 국민보도연맹 핵심 간부를 검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오창지서장은 의용소방대원과 순경을 청원군 오창면 성산리와 각 마을로 급파했다. 성산리 박승하 등 15명이 오창지서 유치장에 구금된 날은 진천 사석과 마찬가지로 1950년 6월 30일이다.


인민군의 서울 점령, 그 이후에 벌어진 일

인민군이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고 남쪽으로 진군을 강행하자 상황은 신속하게 악화됐다. 1950년 7월 8일 계엄사령관 정일권은 전·남북을 제외한 남한 전역에 포고 제1호로 계엄을 선포했다. 이때부터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은 헌병대의 주관 아래 진행됐다. 

오창지서와 사석지서는 관내 보도연맹원들을 2차로 소집시켰다. 마을 소임의 징 치는 소리에 마침 모내기를 하고 있던 중신리 주민들은 허리를 폈다. 그 소리는 보도연맹원들 모이라는 소리였다.

일손을 멈춘 김만봉(1932년생)은 다른 청년들과 함께 마을 공회당으로 갔다. 지서 순경과 의용소방대원들이 보도연맹 명부를 보고 인원을 점검하고 있었다. 보도연맹원들을 빠짐없이 모이게 하기 위해 감언이설을 동원하기도 했다.

당시 청주경찰서에서는 '전쟁이 나서 보도연맹원들을 먼저 피난시켜 주려고 하니 보리쌀 두 되씩을 갖고 무덕관(청주경찰서 내 체력단련장)으로 모이라'고 했다. 그런데 오창에서는 비료를 나눠 준다는 사탕발림을 이용했다. 오창면 유리 김태분의 증언이다.

"이웃집 임봉수 할머니가 와서 '마을 마당에 가면 비료 한 짝을 준다하니 아버지에게 연락하라'라고 해 오빠가 들에서 일하던 아버지께 연락했습니다. 그때 저도 아버지를 따라 마을 마당에 가보니 이웃 마을인 화산, 일신, 여천에서도 온 20여 명 이상 되는 사람들이 친구 오빠 유재호의 말에 따라 줄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 <청원 오창창고 보도연맹 사건>, 2007)

사석지서에서는 각 마을별로 보도연맹원들만 소집한 것이 아니라 국군의 방공호를 파야 한다며 마을 청년 모두를 사석지서 앞으로 모이게 했다. 진천면 상계리 신순철(1931년생)은 사석지서 김재옥, 나세찬 순경이 마을로 와 '아군을 위해 방공호를 파야 하니 청년들과 삽과 괭이를 들로 지서로 오라'고 해서 동네 사람 30여 명과 함께 지서로 향했다.

지서 옆 물레방앗간 옆 신작로에 가보니 벌써 150명 정도가 모여 있었다. 경찰들은 방공호를 파게 한 것이 아니라 명부를 보고, 보도연맹원 약 70~100명을 방앗간에 구금시켰다.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소집)이 이렇게 조용히(?)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다. 진천면 사석리 석박마을에 살았던 서정안(1923년생)은 전쟁이 나자마자 충남 천안군 병천으로 피난을 갔다. 그런데 급하게 피난 짐을 싸느라 양식과 이불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아내와 자식을 병천에 남겨두고 다시 마을에 왔을 때는 김재옥이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시간부로 김재옥 순경에게 잡혀갔는데, 둘은 어릴 때부터 친구 사이였다. 오창면 양청리 유광혁(1926년생)은 7월 8일 보도연맹원 소집 연락이 왔을 때, '지서에 가면 죽을 수 있겠구나'라고 짐작했다. 보도연맹원들을 죽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오창지서와 사석지서에서 상급기관의 명령을 받아 관내 보도연맹원들을 예비검속하고 양곡창고와 방앗간에 구금시킨 건 1950년 7월 8일이었다.

헌병 앞에서 '고양이 앞의 쥐'였던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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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창고 터에 선 유족회 간부 ⓒ 박만순

 
진천면 상계리 신순철이 마을 사람 30여 명과 함께 방앗간 근처 신작로에 다다랐을 때 사석지서 순경들이 명단을 보고 보도연맹원을 골라내 방앗간에 가두었다. 이때부터 진천 보도연맹원들은 헌병에게 인계됐다. 경찰들조차 헌병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 모양새였다. 신순철의 증언이다.

"김재옥은 물론이고 순경들이 돌아가면서 명단을 보며 이름을 호명했어요. 호명당하는 사람은 옆에 있는 방앗간으로 들어갔는데 당시 방앗간에는 군인들이 빙 둘러 보초를 서고 있었어요. (중략) 호명이 끝나자 권총을 한 이파리 두 개 장교(중위)가 명단을 빼앗다시피 하더니 경찰을 향해 "다 했으면 너희들 저리가"라며 마치 애들 다루듯 하더라구요."

사석지서 옆 방앗간에 구금되었던 진천면 보도연맹원 70~100명은 다음 날인 1950년 7월 9일 GMC트럭 3대에 실려 오창으로 이송돼 양곡창고에 구금됐다. 이 과정에서 눈치껏 달아날 수도 있었던 진천면 문봉리 박원종은 오창으로의 이송 과정에 순순히 응했다. '내가 죄지은 것도 없는데 왜 도망가나'라는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의 아들 박찬영(1949년생)의 증언이다.

"사석 방앗간에서 트럭이 출발할 때였어요. 어머니의 진외갓집 어르신이 거기 '박원종이 있거든 내려'라고 했지만 응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또 오창에 도착하기 전에 (진천군) 문백면에서 소변을 볼 기회를 주었는데, 이때에도 도망치지 않았대요."

진천면 보도연맹원들이 오창 양곡창고에 구금되기 하루 전 지서 앞마당에 모인 약 300명의 오창면 보도연맹원들은 한 명씩 지서 안으로 들어가 헌병과 경찰로부터 한 장 분량의 신분 조서를 꾸몄다. 당시 각리 이장을 맡았던 김창석(1929년생)은 지서에서 개인별 신상 조서를 꾸민 다음에 양곡창고에 구금됐다. 

당시 오창 양곡창고는 충북 청원군과 진천군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는데, 폭 30미터에 길이가 50미터이고 높이는 5~7미터였다. 그가 창고 안으로 들어가자 군인들은 "볏짝(벼가마)을 한쪽 벽에 쌓아"라고 시켰다. 전쟁이 나서 인민군들이 진천 잣고개 앞까지 와 보도연맹원들을 피난시켜 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아니 애초에 군경은 그들을 피난시켜 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대동청년단 사무실에 끌려가서 죽도록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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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면 국민보도연맹원 소집경로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참조 ⓒ 박만순


오창면 민애청원들은 마을별로 청주의 대동청년단 사무실로 끌려갔다. 당시 충북 대동청년단(단장: 민영복) 사무실은 청주약국 네거리 근처에 있었는데, "무슨 일을 했냐"며 몽둥이찜질을 가하고 가혹행위를 했다. 1947년에 있었던 일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해방 후 한반도는 민족국가 건설을 둘러싸고 좌·우익 진영이 분열되었고, 이들은 각자의 정치사회단체를 만들었다. 좌익청년들은 1946년 4월 25일 '토지개혁, 평등사회 실현' 등의 주장을 하며 민청(조선민주청년동맹)을 결성했다. 미군정이 1946년 말 민청을 불법화하자, 이들은 1947년 민애청을 결성했다.

이승만과 미군정의 비호를 받은 대동청년단(단장 : 이청천)은 1947년 9월 21일 결성 후 우익 청년의 결집체로서 역할하고 정치테러에 앞장섰다. 대동청년단은 1948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됐다.

북한에서 피신해온 우익 청년들이 결성한 모임은 '서북청년회'로 오창면 소재지에도 사무실이 있어 민애청과 이후 보도연맹원들을 탄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렇게 보면 사상과 신념이 투철한 이들이 민애청에 가입했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오창면 각리 김창석이 그런 경우이다. 오창국민학교와 경기공업고를 나온 김창석은 집에 머슴이 3명이나 있을 정도로 부유한 집안이었다.

가방끈이 길었던 탓에 마을 사람들의 권유로 젊어서부터 이장을 봤다. 그런데 오창 민청원들이 "(민청에) 가입하지 않으면 품앗이를 안 해주고 고립시키겠다. 너 하나만 빠졌다"고 해 민청에 가입했다고 한다. 이승만은 1948년 대통령이 된 후 자신의 정적과 비판 세력을 모두 빨갱이로 몰아부치면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국민보도연맹을 창설했다. 민애청원들은 고스란히 국민보도연맹원이 됐다.

1949년 4월 만들어진 국민보도연맹은 과거에 좌익활동을 한 이들을 전향시켜 대한민국에 충성하는 집단으로 육성하겠다고 천명했다. 가입하면 김일성과 남·북로당으로부터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창의 젊은 남자들은 자신이 좌익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가입해야 했다. 오창 의용소방대(대장: 김팽〇)는 경찰의 지시 하에 보도연맹원 확대에 박차를 기했다.

오창 양곡창고 사건 유족 박임순은 "오창창고 사건 나기 한 달 전쯤 마을 구장과 반장이 품앗이도 하고 비료나 고무신을 타려면 도장을 찍어야 한다고 해서 내용도 모르고 남편이 도장을 찍었는데 그게 보도연맹 가입 도장이었다"라고 말했다.

보도연맹에 가입된 이들은 한 달에 한 번꼴로 소집되어 제식훈련 등 반공교육을 받았으며, 산에 가서 일명 보련초(保聯草)라는 약초를 캐와야 했다. 보도연맹은 완전히 관제반공단체였다.
#오창 양곡창고 #민애청 #국민보도연맹 #사석지서 #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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