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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조국 꿈꾸던 청년, 그 시간부로 '행방불명'되다

만기출소 후 가족 풍비박산... 역사적 판단 제쳐두고 학살 이유 밝혀져야

등록 2023.08.03 10:54수정 2023.08.03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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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건물에서 나온 청년은 쓰레기를 담은 가방을 들고 충북 청주역을 향해 걸었다. 신문과 빈병 등 고물을 어딘가에 버리러 가는 모습이었다. 청년이 나온 건물인 충북민전회관에서 청주역까지는 400미터에 불과했지만, 주변을 살펴보며 걷느라 걸음이 느렸다.

뒤에 미행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청년이 역전파출소 앞에서 일부러 가슴을 쫙 폈다. 그것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살 것이기 때문이다.

청주역에 나타난 청년, 삐라를 뿌리다

역전파출소 맞은 편에 위치한 청주역 광장은 충북선 열차에서 방금 내린 승객들로 붐볐다. 열차 도착 시간에 맞추어 청주역 광장으로 온 청년은 가방을 열더니 위에 있던 신문지와 빈병을 노상에 꺼내놓고, 그 밑에 있던 삐라(전단)를 손에 쥐었다.

청년은 행인들에게 삐라를 한 장씩 주었다. 삐라를 본 시민들이 황겁한 얼굴을 하고 삐라를 주머니에 넣었다. 많지 않은 삐라였지만 길거리에 버려진 것은 한 장도 없었다.

잠시 후 '삑' 하는 휘슬과 동시에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청년은 남은 삐라를 공중에 뿌린 후 본정통(현재의 성안길) 방향으로 전력 질주했다. 청년의 뜀박질이 워낙 빨라 허탕을 친 순경들이 역전광장으로 돌아와 바닥에 떨어진 삐라를 주웠다.

삐라는 '우익테러 분쇄 청주 인민대회'라는 제목으로 시작됐다. 지난 1947년 7월 21일 청주극장에서 개최된 여맹(남조선민주여성동맹) 충북지부 결성식을 무산시킨 정치깡패들을 구속시키라는 내용, 지난해부터 지속된 우익테러를 분쇄하자는 인민대회가 며칠 후인 7월 30일 무심천변에서 개최된다는 내용이었다.


주인 없는 삐라가 뿌려진 때는 7월 27일 오후 2시였다. 삐라를 뿌린 청년은 청주민애청(민주애국청년동맹)원 '이상의'로 진천군 이월면 출신의 활동가에게 그 삐라를 전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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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민전회관 습격 <민보> 1947.5.13일자 기사 ⓒ 박만순

 
민애청과 민전(민주주의 민족전선) 충북지부는 왜 무심천에서 인민대회를 하려 했을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여맹 충북지부 결성식에 대한 우익테러를 규탄하기 위해서였다. 사건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47년 7월 21일 청주극장에서 개최된 남조선민주여성동맹(여맹) 충북지부 결성식은 빨간물(赤色染)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대회가 시작되었을 때 2층 관람석에서 느닷없이 빨간물이 뿌려졌다. 이어서 연단에 뛰어들은 홈정흠(백골단장)을 비롯한 우익 청년들(20명)이 마이크를 잡아 연단을 뒤집어엎어 버렸다.

이때 군중석에 끼어 있던 우익 여성들이 "빨갱이 잡아 죽여라"고 고함을 치는 바람에 1천여 명의 대회 군중은 삽시간에 혼란의 도가니로 빠졌다. 이에 미군 CIC와 한국 경찰이 출동 했다. 좌익 남성 30명과 여성 2명이 부상을 입었다.(충북대책위, <기억여행>에서 재인용)


우익단체의 정치테러는 비단 여맹 충북지부 결성식에 그치지 않았다. 청주시 북문로에 소재했던 민전회관은 정치테러의 주 타깃이 되었다. 1947년 5월 9일 오후 7시 30분경 서북청년회원을 중심으로 한 우익단체원 20명이 곤봉과 맥주병 등을 가지고 습격해 사무실 집기를 부수고 민전 회원들을 구타해 중상자 3명, 경상자 2명이 발생했다.(<민보> 1947.5.13.)

민애청 사무실도 입주해 있던 민전회관에 대한 테러는 1946년 3월 1일, 그해 7월과 9월, 그리고 1947년 3월에도 이어졌다. 좌익에 대한 정치테러를 감행한 우익단체는 대한민청, 백골단, 쇠고리동지회, 대동청년단, 서북청년회 등이었다.
      
"UN 한국위원단 철수하라"

이렇게 해방 후부터 1947년까지 우익의 정치테러가 극심했던 것은 새로운 국가 수립을 둘러싼 좌우 노선의 차이에 기인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권력의 키를 쥐고 있던 미군정이 1946년 10월 조선공산당과 좌익계열 단체를 불법화하고, 우익의 정치테러를 방조·지원하면서 극단적인 좌우 투쟁은 확대재생산 되었다.

민족국가 수립을 둘러싼 좌우 대립은 1948년 5.10 선거를 둘러싸고 정점에 이르렀다. 제1,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좌절되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UN(국제연합)에 상정했다.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국제연합은 1947년 총회에서 UN한국위원단의 감시하에 한반도에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했고, UN한국임시위원단이 1948년 한반도에 파견됐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수순이었다.

이에 북조선은 UN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 입국을 거부했고, 남조선의 좌익단체들은 UN한국임시위원단의 철수를 주장했다. 통일조국을 꿈꾸었던 청년 이상의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에 앞장섰다.

그는 1948년 2월 7일 오후 5시경 청원군 북일면(현 청주시 내수읍) 북일국민학교 뒷산 입구 도로상에서 김아무개로부터 '유엔위원단을 몰아내자'라는 제목의 삐라를 받아 2월 8일 배포하다가 경찰에 검거됐다. 그는 포고령 제2호 위반으로 청주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됐는데, 5.10선거를 앞두고 그해 4월 20일 석방됐다.

농민은 농조, 노동자는 전평, 청년은 민애청으로
 

"농민은 농조(農組), 노동자는 전평(全評), 청년은 민애청(民愛靑)에 가입해야 조선이 빨리 남북통일을 하며,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와 남녀평등과 8시간 노동제를 실시케 된다."

확신에 찬 김희박의 열변에 이상의는 금새 머리를 끄덕였다. 청주시 내덕동 3구 안터벌 출신으로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하고 청주중학교 교사를 역임한 김희박(일명 꽥꽥이)은 민애청 청원군 북일면·북이면 총책임자였다.

청년 이상의는 토지개혁이나 8시간 노동제라는 이야기보다 통일국가 수립이라는 얘기에 귀가 솔깃했다. 청주대성보통학교를 나온 이상의(1925년생)는 경성방직회사에 다니다가 21세에 징용돼 만주 봉천의 방직회사에서 일했다.

해방 후 고향인 청원군 사주면 율량리(현재 청주시 청원구 율량동)로 와 노동에 종사하던 그는 1947년 7월 민애청에 가입했다. 1948년 2월 포고령 제2호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그의 민애청 소속은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1948년 4월 석방되고 5개월간의 심사를 통해 그가 경찰에 전향하지 않고 사상과 신념이 투철한 것을 확인한 상부 조직은 이상의의 민애청 재가입 권유를 결정했다. 1948년 9월 말에 있었던 일이다.

민애청 청원군 북일·북이면 총책임자 김희박의 지도아래 전라도 출신의 장아무개씨(당시 30세)가 연락총책임자를 맡았고 이상의는 북일면 토성리, 오동리, 오리, 외평리, 묵방리 5개 부락 연락책임을 맡았다. 각 마을별로 민애청원들은 세포를 구성했다. 북일면에서의 민애청 활동은 1948년에 본격화됐다.

절도죄로 둔갑되다
 

땅거미가 류정운(가명) 집 마루의 절반을 드리웠던 1948년 10월 2일 오후 7시에 마을 청년들이 하나둘 사랑방으로 모여들었다. 모인 이들은 자신들이 신고 온 고무신을 벗어 방 안으로 들고 갔다. 방에 들어선 청년들은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북일면 덕암리 류정운 사랑방에 모인 이들은 집주인을 포함한 마을 사람 4명과 장씨, 이상의 총 6명이었다. 장씨가 입을 열었다.

"동무들 지금의 정세는 불투명하기만 하오. 지난 8월 15일 이승만을 위시한 반동들이 대한민국을 수립하고 인민들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하고 있소. 또한 양곡매상을 강요해 농민들에게 일방적인 희생만을 강요하고 있소. 이럴 때일수록 농조, 전평, 민애청을 중심으로 단결합시다. 우리의 임무는 민애청 조직을 확대하는 것이오."

덕암리에서의 사랑방 정치좌담회(?)는 오리, 토성부락, 오동리, 묵방리, 외평리, 비중리, 세교리에서도 이어졌다. 모임에서 논의된 내용이 담긴 삐라와 벽보, 그리고 인공기가 민애청원들에게 배부되었다. 1948년 10월 청원군 북일면 각 마을에는 양곡매상 반대와 미·소 양군 동시 철수를 주장하는 삐라가 뿌려졌다.

청주경찰서와 북일지서는 발칵 뒤집혔다. 마을 청년들을 잡아다 족쳤지만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삐라와 벽보의 글씨체를 조사했지만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경찰들의 수사망이 좁혀지자 민애청에서는 새로운 지시사항을 내려보냈다. 등사기를 확보하라는 것이다.

등사기는 북일국민학교(현 내수초등학교)에 있었는데, 김아무개 교사의 도움으로 등사기를 빼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이상의 재판에서는 절도죄로 둔갑됐다.

이상의가 등사기를 훔쳤다는 것인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상의는 장씨가 써준 편지를 김아무개 교사에게 전달했을 뿐이다. 편지를 본 그가 순순히 등사기를 내준 것이기 때문이다.

김희박의 새로운 지시가 내려졌다. "북일면 대동청년단장 한동수는 우리 민애청을 탄압하는 반동이오. 그를 숙청해야 하오." 1948년 11월 25일 오후 8시경 북일면 민애청원 11명이 미호천 팔결다리로 모였다.

현장을 진두지휘한 장씨는 어둠이 사방을 삼켜먹은 뒤인 26일 새벽 1시 30분 정북리 한동수 집으로 이동을 했다. 이상의에게는 마을 어귀에서 망(파수)을 보게 했다. 민애청원들이 한동수 집에 쳐들어갔을 때 집 주인은 이미 도주한 상태였다. 장씨 일행은 현금 2만 8천 환을 빼앗고 한동수 동생 한춘영(당시 36세)을 곤봉으로 구타해 전치 2주의 상해를 입혔다.(충청북도경찰국, <이상의 청취서>, 1949년 1월 12일)

이 사건에서도 이상의는 단지 망을 보았을 뿐인데 1948년 12월 26일 청원군 사주면 율량리 뒷산에서 검거된 그는 모든 죄를 뒤집어썼다. 포고령 제2호 위반, 절도·강도죄였다. 그는 청주형무소에서 1년을 복역한 후 1949년 12월 말 만기 출소했다.

행방불명된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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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덕관 청주 보도연맹원들이 구금되었던 무덕관 실내(1972년 촬영) ⓒ 박만순

 
6.25가 터지자 율량리 보도연맹원들에게 '청주농업학교로 모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석방 후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이상의는 농업학교로 갔다. 밥을 갖고 아들을 면회하러 간 어머니 이언년(당시 56세)은 아들 일행이 청주경찰서 무덕관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

헐레벌떡 무덕관으로 갔으나 이번에는 "미원 방면으로 갔다"는 소식만을 들었을 뿐이다. 미원~보은 방향의 국도변에서 금쪽같은 자식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한참 후에나 알게 됐다.

이상의에게는 다섯 살 어린 아내가 있었다. 그의 아내 김해순(1930년생)은 당시 겨우 20살에 불과했다. 졸지에 전쟁 미망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배 속에서는 새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다음 해에 태어난 그 아기는 이복희(여)였다.

김해순은 1950년대 중반 유복녀 복희를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집을 나갔다. 그런데 소녀 복희도 산판(山坂)을 하는 군인들의 트럭에 실려 어딘가로 갔다. 그 시간부로 행방불명됐다.

통일조국을 꿈꾸었던 청년 이상의 가족은 이렇게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풍비박산이 났다. 그가 꾼 꿈은 역사의 죄인가? 그런 역사적 판단은 제쳐두고라도 만기 출소한 그가 불법적으로 학살된 이유와 그 책임은 밝혀져야 하지 않는가.
#민애청 #미소 양군 철수 #통일조국 #국민보도연맹 #포고령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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