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 학살지도오창 양곡창고에서의 학살정황을 재구성
박만순
오창지서에서 간단하게 신분 확인을 마친 김창석(1929년생, 오창면 각리)은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오창면 각 마을에서 소집된 보도연맹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바닥에는 말할 것도 없고 벼 가마 위에도 사람이 앉아 있는 등 산만하기 그지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창고 안의 사람들은 특별한 근심 걱정이 없는 표정이었다.
경찰들의 지시로 벼 가마를 양쪽 벽체에 쌓아 놓고 자유롭게 담소를 나눈 첫날은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특히 김창석은 지서 순경들과 안면이 있어 대소변을 볼 때 지서와 창고를 자유롭게 오갔다. 식사는 일부 구금된 이들의 가족이 가져온 것을 경찰들이 전해주었다.
진천 쪽에서 가끔 포 소리가 났으나 그것이 인민군이 잣고개까지 와 있는 것으로는 상상할 수 없었다. 군인들의 동태가 궁금하긴 했지만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낮에는 창고 문을 열어 놓기도 했던 평화스러웠던 그날은 1950년 7월 8일이었다.
다음 날인 7월 9일의 공기는 전날과 전혀 달랐다. 오전에는 진천 사석에서 GMC 트럭 3대에 실려 온 보도연맹원 약 70~100명이 창고에 구금되었고, 점심부터는 헌병이 구금자들을 마을별로 불러내 전쟁 전 활동을 조사했다.
무차별 구타의 시작
이런 와중에 물심부름을 하다 도망친 이가 있었다. 오창면 구룡리 김병현(1929년생)은 창고에 구금된 후 물심부름을 했다. 군인들은 구금자들을 창고 문을 기준으로 4개 반으로 편성했는데, 그는 4반 반장이 되었다. 밖에서 물 떠오라는 지시로 나갔다가 군인이 소변보는 틈을 이용해 달아났다. 창고가 완전히 통제되기 전인 7월 9일 오전이었다.
하지만 7월 9일 오후부터는 창고의 경계를 군인이 맡으면서 공기가 한결 험악해졌다. 창고 옆의 변소(화장실)를 이용하는 것이 제한되었고, 가족들이 가져온 식사도 가마니에 담아 한꺼번에 전해주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부 구금자는 함석과 송판으로 된 창고 벽을 발로 차 깨뜨려 도망가기도 했다.(진실화해위원회, 청원 오창창고 보도연맹 사건, 2007)
군인들의 가혹행위가 시작되었다. 군인 2~3명이 들어와 짧은 머리를 한 청년들을 무차별 구타했다. 김창석의 증언이다.
"군인들이 총 개머리판으로 때리며 저희를 향해 공산패라고 했습니다. 특히 머리 짧은 사람하고 상투 달린 사람들을 많이 팼습니다. 그 후 쇠로 창을 만들어 옆구리를 쑤시고 하여 몸에서 피도 나고 총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때리는 등 엄청 많이 때렸어요."
이 과정에서 오창면 유리 임호연의 정강이가 부러졌다. 군인들의 이런 행동은 어떤 증거나 조사를 토대로 한 것이 아니라 다분히 감정적이었다. 군인들의 가혹행위가 4~5차례 이어지자 오창 출신의 헌병이 들어와 군인들을 제지했다.
가혹행위를 한 군인들은 물러 났지만 창고에 구금된 이들의 활동은 한층 통제되었다. 군인들은 창고 문을 완전히 잠그고, 똥장군(대소변통) 2개와 양철 물통 2개를 창고 안으로 들여놓았다.
창고 안은 400명의 땀 냄새와 그들이 배출해 낸 오물 냄새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앉아만 있어도 저절로 땀이 주르륵 흘렀고 손으로 코를 쥐어야만 했다. 하지만 다음날의 상황 전개에 비하면 이날은 양반이었다.
도망치는 자는 이렇게 된다
"군인 가족은 앞으로 나와!"
눈에 살기를 한 군인의 고함이었다. '드디어 살아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한 오창면 신평리 오만기·오성기 형제는 앞으로 나갔다. 오창면 전태준 역시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사며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그것이 부러움을 살 일이 아니라는 것은 금방 확인되었다.
창고 출입구 앞에 서 있던 군인은 "네 동생하고 싸우려고 빨갱이 짓을 했냐"며 오만기·오성기 형제와 전태준을 총 개머리판으로 죽도록 패다가 카빈총 방아쇠를 당겼다. 오창 양곡창고 최초의 희생자가 나온 순간은 7월 10일 저녁이었다.
피의 제전(祭典)은 이어졌다.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30일 충청북도 경찰국의 지시로 1차 예비검속된 이들이 그 희생양이었다. 오창지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던 박승하 등 15명이 지서 안 창고로 끌려갔다. 어떠한 조사나 절차도 없이 군 장교의 손에 들려있던 권총 방아쇠가 당겨졌다. 탄환 15발이 발사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곧이어 헌병이 이만우(오창면 여천리)를 불러냈다. 헌병이 이만우를 보도연맹 간부로 인식한 듯했다. 그러자 이만우는 갑자기 도망치기 시작했고 창고 인근의 가정집 돼지우리에 숨어 있던 그를 헌병이 붙잡아왔다.
헌병들은 창고 안에 있던 보도연맹원들을 모두 창고 밖으로 나오게 한 뒤 "도망치는 자는 이렇게 된다"며 창고와 지서 사이의 신작로에서 이만우를 공개 처형했다.
1950년 6월 30일, 권총이 불을 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