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형(박홍규 화백)서울 운종가의 전옥서 좌 감옥에서 처형당한 동학혁명 지도자들의 형상화.
이영천(고부 신중리 대뫼마을 촬영)
그렇다면 그들은 동학혁명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을까? 혁명은 진압되고, 조선은 누구이건 속국을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시각이 우세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부랴부랴 조선과 수교에 나설 때와는 천양지차였다.
무엇보다 일본이 침략적 제국주의에 편입하려는 조짐을 보였기 때문이다. 청일전쟁은 그 리트머스였던 셈이다. 시모노세키 조약에 반발한'3국 간섭(1895.04)'이 그 방증이다. 이런 측면에서, 자주 국가를 세우려 싸웠던 동학혁명 패배가 그래서 더 뼈아프게 다가온다.
다시 피어나는 녹두꽃... 법관과 나눈 치열한 대화
우금티 학살은 월등한 무기와 화력을 앞세운 일본이, 조선을 대리하여 저지른 명백한 범죄였다. 동학혁명에 나선 농민군은 기꺼이 장렬한 최후를 맞았고 이는 자주적 민족운동의 지향과 나쁜 권력에 대한 항쟁, 그리고 민중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자각을 일깨워주었다.
이후 민중은 항일 무장 의병으로, 3·1운동의 주 항쟁 세력이었다. 또한 1920년대부터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의 기틀이 되었다. 국내에서도 저항적 민족주의의 모태가 되었으며, 각 지역에서 소작쟁의 등 일본의 수탈에 저항하는 주체세력이었다.
특히 전라도에서는 동학혁명이 혈연적이고 실존적인 실체로 작동하였다. 이는 부·조부 등 동학혁명에 참여한 가족 이력이 광주학생운동으로 암태도 소작쟁의로 이어졌고, 지리산을 근거지로 항일 빨치산 투쟁을 이어간 뿌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