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 단소정읍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 서쪽(창동리) 구릉에 마련된 전봉준 장군 단소. 시신을 수습하지 못해 빈 무덤으로 마련되었다.
이영천
각종 기록으로 미루어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도 같은 시각, 같은 자리에서 처형당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전봉준과 손화중의 시신은 여태껏 찾지 못하고 있다. 수많은 노고에도, 모두 수포로 되었다. 어떤 연유에서였는지, 김덕명과 최경선의 시신은 온전히 수습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을미(乙未=1895) 삼월 삼십일에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등이 한양 감옥에서 교형을 받았다. 김방서 혼자서만 특사가 되어 돌아오자, 전라감사 이도재에게 잡힌 바 되어 전주 큰길에서 원사(寃死=원통하게 죽음) 당하였다.
이때 일본 신문에 「조선의 대의옥(大疑獄)」이라는 제목으로 비평이 실렸다 …(중략)… 전봉준 교형 당시 집행 총순(總巡=경무청 판임관) 직이던 강(姜) 모가 말하되 "나는 전봉준이 처음 잡혀 오던 날부터 마침내 형을 받던 날까지 그의 전후 행동을 잘 살펴보았다. 그는 과연 보기 전 풍문으로 듣던 말보다 훨씬 솟아 보이는 면이 있었다. 그는 외모부터 천인 만인보다 특별히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의 깨끗하고 준수한 얼굴과 광채가 나는 안목으로 엄정한 기상이 강하고 장했으며, 품은 뜻은 세상을 한번 놀랠만한 대위인, 대영걸이 분명했다. 과연 그는 평지돌출로 일어서서 조선의 민중운동을 대규모로 일으켜 새 세상을 펼쳐 보인 자이니, 그는 죽을 때까지라도 그의 뜻을 굽히지 아니하고 본심 그대로 태연히 간 자다."라 하였다.
그가 형을 받을 때 교수대 앞에서 법관이 "가족에게 남길 말이 있거든 하라"는 말을 듣고 이렇게 답하였다 한다. "나는 다른 말은 없다.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 가는 사람에게 내 피를 뿌려 주는 것이 어떤가? 어찌 컴컴한 적굴 속에서 암연(黯然=침울하게)히 죽이려 하느냐"며 준절히 꾸짖었다 한다.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269~271)
조선이라는 나라는 반외세·반봉건, 자주 국가를 외친 이들을 역적 취급했다. 죽임 후에도 이리저리 조리돌려 모욕했다. 그 가족과 후손은 고향과 재산, 이름을 버려야 했고 성씨마저 바꿔 숨어 살아야 했다. 목숨을 구걸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이 일제에 이용당하기도 했다. 이 탄압에 일제는 절대 나서지 않고, 철저히 배후 조종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