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시문학관옛 봉암초 선운분교가 폐교하자 이를 개조해, 이 마을이 고향인 시인 서정주의 문학관으로 변모하였다.
이영천
선운리 이웃이 송현리고 그 너머가 봉암리다. 송현리와 봉암리는 대대로 연일정씨 세거(世居)다. 방장산 넘어 전남 장성에 살던 울산김씨 요협(堯莢)이 봉암리 정씨 딸과 혼인한다. 그러면서 봉암 인촌마을로 이주해 온다.
정씨는 만석꾼이었다. 요협은 상당한 농토를 증여받는다. 처가의 힘이었는지 어쨌건 관직에도 오른다. 요협은 이 둘을 바탕으로 재산을 일궈 나간다. 그리곤 서슴없이 친일의 길로 발을 내디딘다. 당시 호남 지주들 공통된 특징이다.
군산 개항(1899)과 더불어 호남평야 쌀이 일본으로 끝도 없이 실려 나간다. 요협은 줄포항으로 거점을 옮긴다. 당시 줄포는 군산에 맞설 만한 대규모 무역항이었다. 쌀 수출로 호남 지주들이 손쉽게 돈을 번다. 요협도 그들처럼 큰 부를 거머쥔다.
이는 농토확장의 또 다른 밑거름이었다. 그렇게 쌓인 부는 확대재생산을 거듭하며, 울산김씨를 손꼽히는 대지주로 변모시켜 주었다. 수많은 농민의 고혈을 빨아서 말이다.
서정주는 그의 시에서 '아버지는 마름'이었다고 술회한다. 다름 아닌 울산김씨 마름이었다. 봉암의 울산김씨는 요협의 손자인 성수(性洙)에 이르러 나라 안 몇 손가락에 드는 거부로 발돋움한다. 열렬한 친일의 결과다. 성수의 호 인촌(仁村)은 할아버지가 처음 이주해 온 마을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고 보니 당시 내 고향은 친일파 일색이었던 모양이다. 수년 전 큰 용기로 할아버지 친일 행적을 사죄한 전 국회의원 모(某)도 같은 고향 사람이다.
손화중 피체지
송현리 고잔마을과 봉암리 봉오마을 남쪽 들판 가장자리, 소요산 자락이 뻗어내린 산 아래 외로이 집 한 채가 앉아있다. 거부 친일파와 친일 문학인이 탄생한 마을을 좌우에 두고서 말이다. 이 외딴집이 이씨 재실(齋室)이다. 이 재실에 손화중이 은거하고 있었다. 하지만 직감으로 마지막임을 알아차렸을 터다. 바닷바람은 또 얼마나 맵찼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