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압력 의혹을 받던 박지원 장관이 물러났고 한나라당의 부산 장외집회가 끝났다. 국회정상화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마련되었고 이제 야당의 등원은 시간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나는 그동안 야당이 벌여온 일련의 장외투쟁을 보며 과거와는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가졌다. 전에 같으면 정권의 비리의혹이 불거지고 야당이 거리로 나갔을 때, 그래도 야당을 향한 국민들의 성원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요즈음은 다르다. 서울에서 거리행진을 해도 시민들은 무덤덤하기만 하고, 시민단체들과 야당의 연대는 거론조차 되지 않는 분위기이다. 비리의혹 규명을 위한 투쟁조차도 한갓 정쟁(政爭)으로 폄하되곤 한다.
집권세력도 민심을 잃고 있지만, 야당도 민심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원인이 정치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에 있다고만 말하면 해법은 너무도 막연해지고 만다.
나는 그 원인을 국민을 설득할 수 없는 현재의 대결구조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대결은 정확히 말해 여당과 야당간의 대결이 아니라,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총재 두 사람간의 대결이다. 두 사람이 물러서지 않는 대결을 벌이고, 이들이 이끄는 정당이 그에 따라가는 모양새이다.
민주당 내에서도 대야(對野) 포용론이 진작부터 대두되었고, 한나라당 내에서도 국회등원론이 진작부터 제기되었지만, 두 사람은 이러한 견해들을 일축하며 국회파행을 방치하였다.
나는 두 정치지도자의 대결을 보면서 과연 정치가 이렇게까지 황폐해져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을 떠올리게 된다. 이들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 그리고 상대방을 꺾어야 한다는 불퇴전의 결의만이 흐르고 있는 듯하다.
어차피 두 사람이 다음 대통령선거에서 직접 상대할 사이도 아닌데, 도대체 이들은 왜 이렇게까지 처절한 무한대결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 두 사람의 끝없는 대결에 우리 정치가 파행의 늪에 빠진 지 3년이 되어가고 있다. 지난 날 양김(兩金)간의 대결은 극적인 재미라도 있었지만, '김(金)-이(李)의 전쟁'은 정말 지루하기만 하다.
나는 정치 이야기를 할 때 양비론(兩非論)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양비론은 당연한 말이나 늘어놓는 설교가 되거나, 기계적으로 책임을 양분하는 절충론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두 정치지도자 사이에서 벌어진 그간의 대결을 보면서 양비론의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두 정치지도자에게 이제는 무한대결을 진두지휘하는 위치에서 물러나줄 것을 요청하게 된다. 두 사람이 이끌어온 그동안의 여야관계가 한시도 평온할 날 없이 파행으로 일관되었다면 이제는 그 책임을 의식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먼저 김대중 대통령은 정치는 민주당에 맡기고 남북관계, 경제문제 같은 국가경영에만 주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당적 이탈도 고려해 볼 만하다.
대통령이 나서서 '법과 원칙대로'를 강조하여 대야협상의 여지를 없애버리는 일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 어째서 대통령이 야당총재와의 기(氣)싸움을 주도하는 '여당총재'로 비쳐지고 있는지 심각히 돌아볼 일이다.
이회창 총재도 이제 '3김(金)식' 투쟁적 지도자로서의 모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제대로 하자면야 정치지도자가 해야 할 역할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데, 머리속이 온통 '김대중 정권'과 싸울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어서야 될 일인가.
언제나 대여 강경투쟁을 선도하며 당 내부의 이견들을 억눌러온 구시대적 리더십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민주적 리더십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두 정치지도자가 당내의 합리적인 목소리를 억누르며 상대에 대한 강경일변도의 노선을 고집하는 상황은 이제 막을 내려야 한다. 민주당이든 한나라당이든 그래도 당 내에는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의 의견을 귀담아 듣고 구성원들의 총의를 모아 당의 방향을 잡아나가면 되는 일이다.
혼자서 전권을 장악하고 마음대로 하지 못하면 '누수'(漏水)라고 생각하는 것은 20세기적 사고이다. 야당이 등원하고 국회가 정상화되면 무엇하나. 여야를 이끌고 있는 두 정치지도자가 발상의 전환을 이루지 못한다면, 파행의 악순환은 변함없이 계속될 것이다.
진정한 정국정상화의 조건은 박지원 장관의 퇴진이나 야당의 등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야를 이끌고 있는 두 정치지도자 자신들의 자세전환에 있음을 우리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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