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장성 넘어 내몽고의 서울로 가는 길에 만난 여인들

경제동물의 이미지를 벗어버려야 한다

등록 2001.06.18 18:00수정 2001.06.18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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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음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다.


그때, 나는 뻬이징에서의 며칠을 뒤에 남기고 더 서쪽으로, 서쪽으로, 떠났다. 기차는 가장 느린 놈으로 좌석은 가장 낮은 경좌(硬座)로, 피난민들 같은 상경민 가족들이 이리 눕고 저리 누워 있는 동역을 떠나니 기차는 만리장성을 넘어 황량한 들판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나의 목적지는 내몽고의 수도 후아하오터. '동포'들이 산다는 만주 연변 쪽으로 갈 수 없는 마음은 그렇다고 해서 서역 끝 신쟝까지 갈 수도 없었다. 돈도 없고 서울로 돌아가야 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내려놓을 수 없는 무거운 등짐을 진 사람처럼 한국이라는 나라를 영영 떼어버릴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다만, "나는 떠나고 싶다"는 포즈를 취하고 있을 뿐이었다.

기차는 황량한 들판 한가운데를 쉼 없이 내달렸다. 양쪽 지평선 끝에 놓인 두 산맥에는 나무 한 그루 없었다. 어쩌다 공리가 주연한 영화 {인생}에 나오는 붉은 인민가옥들이 스쳐 지나갈 뿐 그곳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것만 같았다…. 옥수수같은 작물들이 듬성듬성, 들판이 마치 피부병 앓는 개 옆구리처럼 흉한 것이 농민이란 농민은 다 농사 팽개치고 떠나버린 것만 같았다….

그때, 나는 아낙네들 틈에 앉아 있었다. 뻬이징에 놀러왔다 시골의 집으로 내려가는 아낙네들, 그 아낙네들의 왁자지껄한 소란 속으로 기차는 열 시간 넘게 달리고 있었다. 마침내 아낙네들이 말을 붙여 오고 그네들과 나는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의 '고루한' 전통 한자와 그네들의 '백화문'이 맞부딪쳐 떠들썩한 웃음이 피어나곤 하였다.

그네들 중 하나가 친근한 눈빛으로 스웨터를 하나 꺼내 들어 상표를 보여주었다. 한국산이었다. 동대문 가격으로 만 원쯤이나 할까? 세련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그 옷이 얼마쯤 되어 보이느냐고, 여자는 호기심 잔뜩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얼마나 주셨는데요?
400위안.
우리 돈으로 4만원쯤 된다는 그 말에 나는 잠시 당황해 한다.
한성(漢城)에서는 얼마쯤 하지요?
글쎄요. 서울에서는…, 서울에서도 그 정도는 하겠군요.
그때 시골 아낙네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스쳐 지나감을 나는 놓치지 못했다.

그 시골의 아낙네는 몇 달 아껴 모은 돈을 털어 뻬이징에까지 가 한국이라는, 옷 잘 만든다는 변방 나라의 비싼 옷을 산 게 아닌가? 우리의 농촌 여인들처럼, 어머니들처럼 그녀도 그렇게 했던 것이 아닐까? 만원짜리 동대문 옷을 4만원짜리 뻬이징 옷으로 탈바꿈시킨 이는 과연 누구일까?


중국에서는 지금 한류(韓流)라고 해서 한국의 문화상품이 일대 유행이라고 한다. 그러나 옷을 100 벌을 판들 그 옷을 사 입을 이들의 처지와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장사를 일삼는다면, 한국은 일본을 능가하는 경제동물의 이미지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미 같은 '동포'라는 조선족 사람들이 우리를 그렇게 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지금 우리와 핏줄은 통할지언정 조국은 중국이라는, 중국식 사고를 떳떳하게 펼칠 만큼 우리를 혐오하게 되지 않았던가.

기차는 시름 잊은 그네들의 웃음소리를 싣고 나를 싣고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 다음 글은 <말은 환원되기를 거부한다-본질만을 찾는 시각에 반대하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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