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를 비켜 태어난 것에 대한 이문열의 생각을 보고

등록 2001.07.27 06:45수정 2001.07.27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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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형, 안녕하신지요.

제 홈 <글나라>의 '자유게시판'과 태안문학회 홈피 <백화마을>의 '자유게시판'에 '언론 개혁'을 열망하는 저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말씀을 올려주시어 정말 고맙습니다.

저는 태안문학회원 다수가 심정적으로는 언론 개혁을 바라고 지지하면서도 그것을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하는 데는 소극적인 태도들에 대해서 조금은 실망하고 섭섭한 마음도 지녀왔습니다.

특히 태안군청 홈페이지 '횡설수설' 방에 올린 내 어떤 글에 대해 비겁하고 치사하게 내 이름자를 자귀질한 익명을 걸고 말도 되지 않는 시비를 건 어떤 사람이 "글 밑에다가 '태안문학회장'이라는 말을 달지 말라, 당신이 태안문학회원 전체의 의사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라는 말을 달았을 때 우리 회원이 한 명이라도 나서서 따끔한 일침을 가해주기를 은근히(실은 간절히) 기대했었습니다.

우리 회원이 아닌 어떤 한 사람이 "왜 직함을 사용하는 것까지 시비냐. 가령 연세대 총장이 뭔가를 주장하는 글을 쓰고 그 글 밑에다가 '연세대 총장'이라는 직함을 달았다면 그게 연세대 전체 교수들의 의사를 대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단 말이냐"고 일침을 가해 주어서 고맙고 다행스러운 느낌도 컸습니다만, 우리 회원님들의 침묵의 지속은 정말 섭섭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J형께서 제가 쓰는 언론 개혁 관련 글들을 모두 꼼꼼하게 읽고 저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말씀을 거듭 제 홈과 태안문학회 홈에 올려주셔서 정말 다행으로 여기며, 큰 위안을 얻었습니다.

<태안문학>과 <가톨릭다이제스트> 등에서 접한 형의 글들을 통해 고결한 성품과 늘 정의를 추구하며 참으로 살기 좋은 세상을 꿈꾸시는 그 정신 세계를 익히 알고 있는 저로서는 언론 개혁을 열망하는 저를 지지하고 격려해주시는 형의 그런 태도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리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실은, <조선일보>의 '위기의 지식인 사회'라는 이름의 특집에 참여한 형의 친제(親弟)인 조규익 숭실대 교수가 지난 7월 19일자 지면에 「공존 파괴하는 언어 폭력」이라는 글을 쓴 후로는 제가 은근히 걱정도 했더랬습니다.

조규익 교수가 조선일보에 글을 썼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 각별한 긴장감을 갖게 하는 것이었지요.

조규익 교수의 글에서는 '톨레랑스'의 미덕을 강조하는 것이 적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오마이뉴스> 고태진 기자의 지적처럼 조선일보 지면에서 '톨레랑스'라는 단어를 접한다는 것이 일종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하면서 세상이 많이 변하긴 했다는 생각도 갖게 하더군요.


"이 시대에 또 다른 차원의 책무가 지식인에게 요구되었다. 상대방이 나와 다를 수 있음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똘레랑스(tolerance)'의 미덕이 바로 그것이다. 공존은 관용과 열린 가슴을 전제로 하는 삶의 방식이다. 그럼에도 이 시대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말에 좀더 험한 날을 세우기에 바쁘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려는 일이야말로 공존을 거부하는, 시대 역행적이며 반지성적인 폭력일 뿐인데도 말이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 못하는 지식인들이…너절한 쾌감을 맛보고자"라고 한 말이 참 곤혹스럽긴 합니다만, 조 교수가 부분적으로는 참으로 옳은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조 교수가 조선일보를 의식하고 일종의 간접 화법을 활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글은 제게 재미롭게도 느껴졌습니다.


왜냐 하면 조 교수의 그 말은 고스란히 조선일보에 되돌려질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지요. 참으로 그것은 조선일보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덕목이 아닐까요?

과거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자기들과는 생각이 다른 '진보적'인 사람들에게 걸핏하면 사상 검증을 한다고 설쳐대고, 색깔론의 올가미를 씌워 일자리에서도 쫓아내고, 자신들이 조작해 내는 타락한 여론의 힘으로 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려고 했던 조선일보의 횡포를 조 교수가 전혀 모르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극심한 언어 폭력, 논쟁의 과열, 적 만들기와 편가르기가 사실이라면 그것은 조선일보가 시초한 일이며, 오늘의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반성할 줄 모르는 조선일보의 후안무치가 선도하며 심화시키는 것이지요.

조규익 교수까지 동원하여 그런 얘기까지 하게 하는 조선일보는 정말로 뻔뻔스럽습니다. 적반하장의 새로운 경지를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조 교수의 기고는 물론 조선일보의 논조를 대변하는 것이겠지만, 오히려 조선일보 스스로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금언이라는 점에서 이채롭기도 하고, 그래서 저는 조 교수가 간접 화법을 의도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더 강하게 듭니다.

하지만 조선일보에게 그런 자질이나 능력이 있을지는 참으로 의문입니다.

아무튼 저는 조 교수의 그런 글에서 또 하나 느낀 것이 있어서 차후에 조금은 재미도 있을 또 한가지 작업을 해 볼 생각입니다. <지요하의 참된 세상 꿈꾸기>라는 '연재 기사' 방이 마련되어 있는 <오마이뉴스>를 비롯하여 여러 유명 사이트들에 올라 있는 내 글에는 독자들의 꽤 많은 '의견'들이 달려 있습니다. 공감을 표시하거나 지지 격려하는 글들과 그렇지 않은 글들의 비율은 대략 7대3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한가지 특기할 점은 내 글에 대해 비난 비방이나 욕설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익명을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내 이름자를 자귀질해서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는 내 사촌형님이나 선친의 함자까지 가져다가 멋대로 비틀고 자귀질을 해서 올려놓는 사람들도 있는데, 언어 폭력의 극치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떳떳하게 실명을 사용하면서 내 생각에 대응하는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면서 개진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 분은 매우 특이한 형태의 비방 글을 나중에 삭제를 하고 제게 사과를 해서 제가 고마운 뜻을 표하기도 했습니다만, 저는 저에 대한 익명의 비난이나 비방 글들도 함부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모두 알뜰히 '한글 문서'에다 옮겨 모아놓고 있지요.

그래서 하는 얘긴데, 언젠가는 한번 기회를 잡아 그 익명의 비난 비방 글들에 대해서도 (한분 한분에 대해) 조목조목 성실하게 답변을 드려볼 생각입니다. 꽤 의미롭고 재미있는 작업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J형. 서론이 너무 길었습니다만, 오늘은 '일제 시대를 비켜 태어난 것에 대한 이문열의 생각'에 대해 글을 쓰려고 하니, 우선 슬픈 이야기부터 하나 들려 드리고 넘어가겠습니다.

1993년 가을의 일입니다. 제 어머니의 칠순 날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머니의 칠순 잔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슬픈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10년 전 어머니의 회갑 때 잔치를 못해 드린 죄가 너무도 커서 칠순 잔치만큼은 잘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작가로서의 내 처지는 여전히 처량하기 그지없었지만, 다행히도 아내가 초등학교 교사여서 호구 걱정은 하지 않으며 어머니의 칠순 잔치를 위해 일찍부터 적금을 들고 돈을 모았습니다. 축의금 봉투를 일절 받지 않는 형태의 잔치를 작정했었고, 어머니의 친구분들께 제주도 여행을 시켜 드리겠노라고 일찌감치 공언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매제 한 사람의 사업이 엉망진창이 되는 바람에 그만 잔치 비용으로 모았던 돈을 모두 털리고 말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보증빚의 덫에 걸려 참으로 고통스러운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의 칠순을 맞게 되었지요.

잔치를 할까 말까 고민 고민하다가 염치 불고하고 축의금 봉투를 받는 형태의 잔치를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어머니는 편치 않으신 기색이면서도 축의금이 좀 들어와서 잔치 비용을 제하고도 남으면 사업이 수렁에 빠져 있는 딸네를 도와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셨는지 잔치를 동의해 주셨습니다.

날씨도 좋았고, 손님들도 많았고, 음식 칭찬도 들을 수 있었고, 잔치는 그런 대로 흥겹게 잘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잔치 장소인 야외 음식점 건물 바로 옆의 작은 분수 연못이 사람 잡는 연못일 줄을 꿈에도 몰랐습니다. 내 동생의 첫 아이인 네 살배기 녀석이 그만 물에 빠져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때의 그 충격과 슬픔을 이루 다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곤 합니다. 그 다음의 일은 형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길에서 만난 어떤 지인 한 분이 제게 위로의 말씀을 하던 끝에 이런 말을 하더군요.
"그러니께 하느님은 없는 거지요?"
그는 우리집이 독실한 천주교 신자 가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 거짓말 같은 비극이 일어난 날 오전에 성당에서 제 어머니의 칠순 기념 '축복미사'를 지낸 사실도 잘 알고 있는 분이었지요.

저는 어떻게도 대꾸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저 머리에 흐릿하게나마 떠오르는 것은, 내가 현실적인 작은 욕구에 너무 얽매이고 치중한 나머지 또 한번 하느님을 죽였구나!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저는 그 길로 해미로 달려갔습니다. 해미는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생매장순교성지'가 있는 곳입니다. 해미순교성지는 흥선대원군 시절에 약 3천 명의 신자들이 순교를 한 것으로 추산되는 곳이지요. 그중에서 생매장으로 순교한 신자 수는 8백 명쯤으로 추정을 하고요. 그런데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도 천주교의 무수한 순교성지들 중에서 산채로 묻혀서 순교한 곳은 해미성지가 유일하다는군요.

저는 해미의 3천 여 명에 달하는 무명 순교자들의 혼이 어려 있는 성지 한 켠 돌덩이 위에 앉아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평소 눈물이 헤픈 심성이긴 하지만, 그렇게 눈물을 많이 흘려본 때도 드물지 싶습니다.

저는 울면서 순교자들의 순교 장면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전에는 그저 간단히 '순교'라는 두 글자만으로 생각을 마무리하곤 했었지요. 그냥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생각일 뿐이었지요. 그런데 그날은 순교자들의 순교에 이르기까지의 갖가지 참혹한 사정들이며, 고문의 고통이며, 죽음 직전의 마음 상태며, 최종적인 순교 장면이며…온갖 것들이 마치 그림을 보듯이 눈앞에 세세하게 떠오르더군요.

1984년 한국천주교 200주년 때 103위 순교 성인들의 탄생과 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방한을 기리기 위해 전5권으로 만들어진 '103위 성인들의 생애'라는 책의 필자로 참여하여 17분의 이야기를 쓸 때도, 그렇게 처참한 순교 장면들이 눈앞에 명확하게 그려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눈물도 흘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순교자들의 고통이 명확하게 눈앞에 그려지는 현상 속에서 정말 오래도록 울었습니다. 그리고 울면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왜 그토록 참혹한 고통을 겪으며 죽음의 강을 건너간 것일까? 그들을 그렇게 죽게 만든 힘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하느님의 현존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하느님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죽어갔고, 죽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사실에서 다시 한번 하느님의 위대한 힘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제가 생각한 것은, 나도 박해 시대에 살았다면, 나도 과연 순교를 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 자신에 대한 그 의문은 참으로 예리하였습니다.

저는 자신할 수 없었습니다. 순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그 참혹한 고통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저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없다고 하더라도, 나도 순교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라도 하고 사는 것이 옳은 일일 것 같았습니다. 천주교 신자라면 마땅히 그렇게 마음을 먹는 것이 옳은 자세일 것 같다는 생각이었지요.

한편으로는 박해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저의 집은 제 아버지 대부터 천주교 신자가 된 경우이기 때문에, 박해 시대에도 천주교 신자일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만, 하여간 박해 시대를 비켜 태어난 것이 정말 다행스럽기 한량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박해 시대를 비켜 태어난 것을 마냥 다행스럽게만 생각해서는 안될 것 같았습니다. 지금은 박해 시대가 아니더라도, 지금은 지금 대로 '순교'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습니다. 언젠가 어느 책에서 읽은 것이기도 합니다만, 현대에도 순교가 있을 수 있는가? 현대에서의 순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들이 제 가슴에 새롭게 깊은 울림을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 새로운 가슴의 깊은 울림 속에서 저는 좀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의 신앙 터전을 닦아주신 순교자님들께 무한히 감사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며, 무릇 사사로운 욕심들을 버리고 참으로 겸허하게 살아야 할 것이며, 내가 나 자신을 희생시키며 사는 것이 현대의 '순교'일 수 있으며….

그러다가 저는 마침내 스스로 순교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 좀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지요. 물론 한계를 지닌 인간이기에 혼선과 착오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때마다 '갱신'의 의지를 다시금 곧추 세운다면 그 순교의 길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적인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교적인 삶 속에는 투철한 정의감과 의로운 분노도 당연히 포함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후 저는 아내에게 나의 그런 생각과 결심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아내는 기꺼이, 그리고 깊이 공감하고 동의를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함께 대전 성모병원의 '헌안은행'에 사후에 안구를 기증하기로 '서약'을 했습니다. 다음에는 천주교 '한마음한몸운동본부'를 통해 가톨릭중앙의료원에 사후에 장기 기증을 하기로 서약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톨릭의대에 해부 실습용으로 시신을 기증하기로 했는데,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부모 형제들의 '동의서'가 반드시 필요한 일인데, 어머니와 동생들을 설득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부부가 진심으로 간절히 뜻을 표하니 마침내 어머니와 동생들이 동의를 해 주어서 우리는 드디어 시신 기증 서약을 하고 가톨릭의대로부터 '시신기증등록증'을 교부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지금도 늘 그 등록증을 꼭 휴대하고 다닌답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내가 나 자신을 희생시키며 사는 소소한 선행(?)들은 적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사실은 위에 적은 말들도 겸연쩍은 일입니다.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말라"는 말씀이며,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 부끄러워지는 일이지요.

J형. 제가 위에서 장황하게 펼친 종교와 관련하는 이야기들은 결코 제 종교와 신앙을 선전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저 나름껏 생각과 삶의 바른 태도를 이야기하기 위해 어느 정도 설득력을 지닐 수도 있는 일종의 '필요 사항'들을 소개했을 뿐입니다.

사실 제가 저 자신을 희생시키며 사는 것은 종교와 관련하는 것들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이미 형도 잘 느끼고 인정하실 테지만 제가 고장에서 <태안문학회>를 만들어 운영하는 것도 실은 희생적인 성격과 부분이 많습니다. 시간 손실이며, 신경 분산이며, 정력 투입이며, 경제적 부담 등등을 생각하면 절로 한숨이 나오기도 합니다.

한번은 오로지 내 소설 작업에만 열중하고 전력 투구하며 살고 싶은 간절한 소망 때문에 눈물을 흘린 적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태안문학을 놓지 못하고 열중하는 그 이유들에 대해서는 굳이 다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형이 잘 느끼고 생각하고 인정하시는 것들일 터이니….

나이 마흔에 결혼하여 얻은 이제 중학교 2학년과 초등학교 5학년인 아이들을 하느님 안에서 신앙을 가르치며 키우면서도, 저는 국가와 민족에 대해서도 똑같은 비중으로 제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제 아이들이 나라와 민족의 오늘의 현실과 장래에 대해서 진정으로 고민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소망하며, 그것의 기초는 부모의 책임임을 절감하곤 합니다.

한번은 제 딸아이가 교실에서 지역감정 문제를 놓고 친구들과 몹시 언쟁을 했다더군요. 다수의 아이들이 충청도는 자민련을 지지해야 한다고 한 바람에 그것은 옳은 생각이 아니라고 하고 그것의 옳지 못함을 충분히 설명을 했는데도 아이들이 이해하지도 동의해 주지도 않아서 몹시 실망하고 섭섭했노라는 딸아이의 말을 들을 때는 딸아이에 대한 묘한 가엾음 때문에 적이 가슴이 아프더군요.

또 한번은 숫자 4 때문에 논쟁이 벌어졌다더군요. 다수의 아이들이 4를 재수 없는 숫자로 간주하고 기피하는 바람에, "숫자 4와 한자인 죽을 사(死)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4라는 수가 얼마나 좋은 수인 줄 아느냐. 사람의 사지, 네 개인 자동차 바퀴와 책상다리, 사계절 등을 보아라. 4자는 재수 없는 숫자가 아니라 반대로 재수 좋은 수란다"라고 내 딸아이가 열심히 설명을 했는데도 아이들이 "그래도 싫은 것은 싫은 거야"라며 끝내 동의를 해 주지 않아서 울고 싶었노라는 말을 할 때는 딸아이에 대한 연민이 제 가슴에 그득해지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 딸아이도 장차 이 아비처럼 다수의, 대중의 무지 속에서 혼자 고뇌하고 신음하며 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할수록 괜히 심란스러워지는 일이더군요.

저는 요즘 괜한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습니다. 중학교 2학년의 교실 풍경이 자꾸만 떠오르고, 오늘은 그 교실 안에서 또 엉뚱한 논쟁이 벌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에 모골이 송연해지는 듯한 공포감을 맛보곤 한답니다.

다수의 아이들이 "한국 최고의 작가라는 이문열 선생님도 일제 시대에 태어났다면 친일을 했을 거라고 했다더라. 친일이 뭐 그렇게 나쁜 거니?"라고 하고, 또 "일제 시대엔 우리 국민 80퍼센트가 친일파였대.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나도 너도 일제 시대에 태어났다면 친일파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어, 얘"하고 설친다면…?

자칫하면 제 딸아이는 80퍼센트가 넘는 친일파들의 득세 속에서 그만 묵사발이 될지도 모릅니다. 혼자 잘난 척하고 애국자인 척한다고 '왕따'를 당할지도 모릅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작가라는 사람까지도 친일파를 거들고, 자신도 일제 시대에 태어났다면 친일을 했을 거라는 어이없는 요설을 퍼뜨리는 판국이니, 중학교 2학년의 그 교실 안에서 절대로 친일파가 될 수 없는 제 딸아이는 그만 친일파들의 득세 때문에 저 만주 벌판에서 목숨 걸고 독립 투쟁을 하고서도 광복된 조국에서조차 대우를 받지 못하고 아들 손자에까지 빈곤을 물려 주어야 했던 독립 투사들처럼 처량하고도 처참한 신세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있는 일입니다. 사실 나도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렇게 함부로 말로 표현해서는 안됩니다.

이문열씨가 말은 그렇게 했어도 실제로 일제 시대에 태어났다면 반대로 독립운동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문열씨의 그런 발언에 대해 신랄하게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막상의 국면에서는 더 쉽게 친일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늘 그런 가변성이 있습니다. 재야 시절 그렇게 열렬하게(?) 민주화 투쟁에 헌신(?)했던 이재오나 김문수 등이 오늘에 보여 주고 있는 그 기막힌 변신의 경지 ―말을 바꿔 타면 더 죽어라 하고 내달리고 싶어하는 인간의 천박한 속성을 여지없이 보여 주고 있는 치기 만장한 행투들을 보노라면 인간의 그런 가변성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고 그만큼 무서운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인간의 그런 가변성을 인정한다면 이문열씨와 나의 처신이 막상에 가서는 뒤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런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해서는 안됩니다. 명확한 역사의식과 민족적 자존심과 웅혼한 문학정신으로 민중(대중)을 계도하고 이끌어야 할 대작가가 치기 만장한 망발과 요설을 그렇게 함부로 늘어놓아서는 안됩니다.

더구나 그 이문열씨의 그런 발언이 어떤 특별한 문학적 철학적 사유와 관점이 필요한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나온 것도 아니고, 고작 족벌신문 조선일보의 친일 이력을 변호하고 분장하기 위해서 아주 쉽사리 나온 것이기에 더더욱 유치하며, 저를 슬프게 합니다.

저는 오늘도 제 딸아이가 걱정됩니다. 이제 겨우 중학교 2학년인 딸아이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제 팔자가 괜히 얄궂게도 느껴집니다. 80퍼센트나 되는 친일파들 속에서 제 딸아이가 무사할지 정말 의문입니다.

너무 비약적이고 장난스런 과장법이라고요? 설마 J형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딸아이에게 "교실 분위기를 보아서 수틀리면 너도 차라리 친일파가 돼 버려!"해 버릴까? 그게 속 편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결국은 제 조상님들도 친일파로 만들어버리는 짓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 조상님들 중에 저 만주 벌판으로 가서 독립 운동을 하신 분은 한 분도 계시지 않지만, 그저 그냥 변함없이 농투성이로 사신 분들이지만, 일반 백성으로서의 그런 순응적 삶이 곧바로 친일적인 삶이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다 얼마큼씩은 일제에 대한 괴로움과 저항심이 있었다고 봅니다.

이제 와서 제가 이상한 수치 놀음에 휘말려서 제 조상님들까지 친일파로 만들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대작가 이문열씨가 아무리 친일파를 거들고 조선일보를 미화한다 해도, 저와 딸아이도 아들녀석도 결코 친일파가 될 수 없는 이치는 너무도 자명합니다.

인간에게는 가변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올곧은 기상과 초지일관하는 웅혼한 정신도 있기 마련이니까요. 또 그것이 더욱 귀중한 가치이니까요.

J형. 저의 이 길고 긴 변설을 끝까지 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밤이 깊었군요,
이제라도 편안한 잠 이루십시오.


2001년 7월 27일 꼭두새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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