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모호하고도 음울한 혼탁의 강

보수주의자임을 자처하시는 K형에게

등록 2001.07.24 07:24수정 2001.07.24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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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형.
당신에게 내가 오늘 이런 글을 쓰게 되리라고는 일찍이 생각지 못했소만, 요즘 한창 맹렬히 진행되고 있는 '언론 개혁' 운동과 관련하여 이런 글을 쓰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동기동창인 당신에게 존대말을 사용하는 것은 내 평소의 버릇이니 별 문제가 아닐 것으로 생각합니다. 1948년생인 나는 제나이에 학교에 들어갔지만, 대다수의 동기들이 그렇지를 못해서, 나는 저 청년 시절부터 나보다 나이가 많은 동기들에게는 존대말을 써 버릇했으니까요.

K형. 내가 오늘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당신이 평소 '보수주의자'임을 자처하면서, 그 보수라는 말이 무슨 보배라도 되는 양 걸핏하면 입에 올리곤 해 온 것을 내가 잘 알기에, 그리고 요즘 '조중동'이라고 표기되는 족벌 신문들에 이른바 보수 논객들의 글이 자주 올라와 보수를 한껏 옹호하고, 또 인터넷 사이트들에서 '보수꼴통'이라는 자칭 타칭의 말들도 많이 접하게 된 연유로 말미암아 보수의 속내와 진정한 가치 쪽으로 생각을 한번 깊이 해 보았기 때문이오.

나는 우선 우리 나라에 진정한 보수는 없다는 단언부터 분명히 해 두고 넘어가겠습니다. 우리 나라에 진정한 보수는 없습니다. 그저 사이비 보수만이 있을 뿐입니다.
왜냐 하면, 보수할 만한 가치를 지닌 것을 보수하고자 할 때 비로소 진정한 보수가 성립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신들이 주장하는 보수들은, 속내를 들여다보면 전혀 보수할 만한 가치를 지닌 것을 보수하고자 하는 보수가 아님을 훤히 드러내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그것들을 조목조목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앞서, 나도 상황에 따라서는 어느 정도 보수주의자가 될 수 있고, 실제로 보수주의자가 되기도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렇습니다. 나도 때로는, 부분적으로는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곤 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집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저희들끼리 밥을 먹는데 젓가락이 아닌 포크를 사용하더군요. 그게 젓가락보다 사용하기가 간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호통을 쳤지요. 그리고 한 번은 아들녀석이 한 손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한꺼번에 쥐고 사용을 하더군요. 그때도 내가 호통을 쳤지요. 내가 어렸을 적에 내 아버지로부터 곧잘 받았던 밥상머리 교육을 그대로 재연을 한 셈이었지요.

그때 내 딸아이가 재미있는 말을 하더군요. 아빠는 너무 보수적이라나요. 그때 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네 말이 맞다. 그러나 아빠의 이런 보수는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하고 귀중한 가치가 있는 것이란다."
그 다음에 이어진 내 설명을 어린아이들이 잘 귀담아듣고 이해를 하더군요.

나의 보수적인 태도는 몇 년 전 이해찬 씨가 교육부장관으로 있으면서 단행했던 '교원정년 단축' 때 또 한번 발휘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그것을 '교육 개혁'의 하나로 치고, 더불어 진보적 시각에 의한 일로 여기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그것을 절대로 개혁이 아닌 개악이요 실수로 간주합니다만), 그 친구들이 그것을 굳이 개혁이나 진보로 친다면 반대 쪽에 선 나는 보수가 되겠지요. 나는 그런 문제에 '경제 논리'를 결부시키고, 다른 분야와의 '형평'을 운운하는 것 등이 너무도 천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교원들에 대한 처우도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에서, 경제 논리나 형평성 따위를 초월해서 교원 정년만큼은 그대로 두는 것이 진정으로 교육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나는 지금도 이해찬 씨가 저지른 교원 정년 단축은 전혀 철학적인 고려가 실리지 않은 무모한 일로서, 현 민주당 정권의 큰 실정 중의 하나라고 보는 기왕의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나의 보수적인 태도는 그밖에도 더 있는데, 환경 문제에 관해서는 더더욱 보수적입니다. 가령 '동강'에 댐을 건설하고 '새만금'에 제방을 쌓고 하는 일들에 있어서 개발론자들을 일단 진보로 친다면, 그것을 반대하고 강과 바다의 원 상태를 지키려고 하는 쪽은 보수로 볼 수 있겠지요. 물론 조금은 무리한 표현법이긴 합니다만….
아무튼 나는 이렇게 사안에 따라서는 보수가 되기도 하고, 보수와 진보 사이를 자유스럽게 탄력적으로 넘나듭니다.
그리고 사안에 따라 내가 견지하는 보수는 우리 사회에 참으로 필요하고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말하자면 보수할 만한 가치를 지닌 것을 지키려는 진정한 보수라는 얘기죠.

내가 왜 이렇게 나의 일련의 보수적인 태도까지 장황하게 기술을 하느냐 하면, 만고 불변의 보수 세력임을 자처하는 당신의 태도와 재미있게 대비를 해 보기 위해서입니다. 변함없는 보수자임을 강조하는 당신도 사안에 따라서는 진보주의자가 될 수 있고 또 되기 때문이지요.


가정 안에서의 '밥상머리교육' 쪽에서는 당신이 어떤 태도일지 알 수 없습니다만, 이해찬의 천박한 교육개혁 문제에 있어서는 당신은 분명히 진보주의자였습니다. 그야말로 경제 논리를 결부시키고 다른 직종과의 형평성 문제를 거론 강조하면서 당신은 완전히 이해찬 씨 편이었으니까요.

환경 문제에 있어서도 당신은 마찬가지입니다. 나라의 경제와 식량 자급자족을 위해서는 동강댐도 새만금 간척공사도 필요하다는 것이 당신의 생각이니, 그 방면에 있어서는 당신은 진보주의자입니다. 지역경제를 위해서는 안면도에 골프장을 건설하는 것도 좋다는 당신의 주장 때문에 동창회 모임에서 당신과 내가 크게 다툰 적도 있지요. 서산과 홍성을 잇는 천수만 제방의 교통 편리를 살리는 선에서 제방을 허물어 천수만을 다시 바다로 환원해야 한다는 내 주장을 당신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고, 너무도 엉뚱한 실현 불가능한 생각이라고 화를 내며 일축했고….

이렇게 사안에 따라서는 진보주의자가 되기도 하는 당신은 그러나 '진보'라는 말 자체를 몹시 싫어하는 것 같더군요. 개발론자도 너른 의미에서는 진보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는 내 말에 당신은 펄쩍 뛰었으니까요. 진보라는 단어만으로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당신을 보면서 환경파괴론자들과 '개발귀신'들까지 진보의 범주에 넣는 건 사실 너무 무리이고 격에 맞지 않는 것임을 나는 절감할 수밖에 없었지요.

진보라는 말 자체도 싫어할 정도로 철저히 보수주의자인 당신은 그러나 애석하게도 당신이 고수하고 있는 그 보수의 속내도 잘 모르는 것 같고, 별로 진지하게 성찰을 해 보는 것 같지도 않더군요. 당신의 그 보수성에 별다른 고뇌가 없다는 사실은 상대적 처지에 있는 나를 더욱 슬프게 하는 일이지요.

김종필 씨의 자민련에 의한 이른바 '황색바람'이 우리 충청도 땅을 휩쓸던 때의 일이 생각나는군요. 그때 당신은 철저히 자민련 편이었습니다. 자민련을 지지하는 것만이 충청도의 자존심을 살리고 명예를 지키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그따위 천박한 지역 감정이 오히려 충청도의 자존심과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라고 내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당신은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그때도 자신의 보수적 기질을 자랑하였지요.

당신이 좋아하는 보수 원조 김종필 씨가 국무총리 시절 일본을 방문했을 때의 일도 생각나는군요. 일국의 국무총리가 일본 국회에서 일본말로 연설을 한 것 때문에 내가 <태안신문>에 칼럼 하나를 썼었지요. 민족적 자존심이라곤 털끝 만큼도 없어보이는 김종필 씨의 행태― 일제 식민지 시절에 대한 향수와 친일 정서가 내면에 가득한 듯이 보이는 김종필 씨를 질타하는 글이었지요.

그때 그 글을 읽은 당신은 격분을 했었지요. 나는 그때 김종필 씨를 포함하여 당신 같은 보수 꼴통들에게는 민족의 자존심 같은 건 아무 필요도 가치도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었지요. 그리고 당신들의 그 보수와 친일 친미 사대주의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도 확인할 수가 있었지요.

지지난해 여름 우리 고장 태안에서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을 돕기 위한 거리 모금을 할 때의 일도 생각나는군요. 수많은 사람들이 바쁜 걸음을 멈추고 차를 세우고 모금함에 성금을 넣으며 우리를 격려했지요. 고사리 손으로 돼지저금통을 들고 오는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볼 때는 우리 민족의 밝은 장래를 보는 듯한 감동을 맛보기도 했지요.

그런데 당신은 내게 전화를 걸어 북괴군에게 무기를 대주는 수작이라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 돈이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갈 줄 아느냐, 북괴군에게 군량미를 대주는 것밖에 안된다며 술취한 소리로 마구 욕을 퍼부어 대어서 나를 참 곤혹스럽게 했지요. 그때 내가 처음으로 당신께 반말을 하면서 같이 욕설을 입에 담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좀 미안스럽기도 합니다.

작년 여름의 일도 생각나는군요. 동창회 모임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과 남북 정상 회담에 의한 공동 성명서 발표 등이 잠시 화제가 되었었지요. 그때 당신은 단호한 소리로 아주 분명하게 말했지요. "김정일에게 나라를 들어바치자는 짓이지 뭐여!"라고. 의외로 당신의 그런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동창들이 여럿이더군요. 물론 다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아무튼 나는 그때 당신 같은 보수 꼴통들에게는 민족의 화해도, 통일도 다 필요 없는 일이고, 오로지 영구적인 분단 고착화만이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는 기분이었지요.

그때 남북 이산 가족들의 상봉에 관한 이야기―전국을 '눈물바다'로 만든 장면들에 관한 이야기도 잠시 화제에 올랐는데, "눈물이 통일을 가져오는 건 아니지만, 앞으로 더 많은 눈물을 흘리고 싶다"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오자 당신은 나를 몹시 비웃었지요. 그렇게도 마음이 여리고 눈물이 헤프니 김정일이한테 잡아먹히기 똑 알맞겠다며….

너무도 기가막혀서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도 않더군요. 나는 그때 당신 같은 보수 꼴통들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밖에 없었는데, 정말로 가슴이 아리더군요.
"대한민국 국군의 탱크가 평양의 주석궁에 진주를 해야 통일이 된다"고 한 월간조선 조갑제 주간의 피비린내 나는 말이 상기되어 다시 한번 가슴을 섬뜩하게 했고….

요즘의 언론 개혁 문제에 있어서도 당신은 철저히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언론 개혁 문제를 오로지 정치적인 관점으로만 파악을 하고 있지요. 김대중이와 민주당 놈들이 지금까지의 실정을 만회하고 내년의 대선에서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서 언론 개혁을 한답시고 언론사들에 대한 세무조사를 단행하여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심각한 국론 분열 현상을 초래하였다는 것이 당신의 주장입니다. 입에 게거품을 무는 당신을 보면서 어쩌면 저렇게도 조선일보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잘 옮길 수가 있을까! 나는 신기한 느낌마저 들더군요.

또 하나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은, 수구 원조 김종필 씨를 충청도 명예의 심벌로 숭배하는 당신이 지금에는 김종필 씨보다 이회창 씨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회창 씨도 충청도 출신이라는 말이 당신의 입에서 쉽사리 나오고 있고…. 이회창 씨는 충청도는 별로 기대하지 않고, 경상도 쪽의 지역감정에 더 많이 기대고 있는 상황인데….

아무튼 당신은 수구 보수 기득권을 앞으로 더욱 확실하게 지켜 줄 사람은 이회창 씨라고 단정하는 것 같습니다. 미구에 당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같고요.

당신은 족벌 신문들의 세금 포탈에 관해서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이 어디 있겠느냐는 말로 대응을 하더군요. 세상이 다 그렇고 그런 것 아니냐며, 어느 분야나 적당히 더럽고 부패한 상태일 때 더 스므스하게 잘 굴러가는 법이라고, 나로서는 난생 처음 듣는 참으로 오묘한 요설을 펼치더군요.

그럼 당신도 적당히 더러운 상태냐고, 당신도 어느 정도 부패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냐고 내가 물으니, 당신은 세상이 어떻게 그렇게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깨끗해질 수 있느냐는 말만 되풀이하더군요.

그럼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서 자식들에게 물려 주는 것이 옳으냐, 자식들도 그냥 우리처럼 부패하고 더러운 세상에서 그럭저럭 굴러가며 살게 하는 것이 옳으냐 하고 내가 물으니, 아무런 부패도 없는 깨끗한 세상은 진보주의자들의 헛된 꿈일 뿐이라는 말만을 당신은 또 되풀이하더군요.

당신의 그런 말을 듣고 보니 당신 같은 수구 꼴통들에게는 '희망'이라는 것이 없구나, 보수주의란 현실 고착주의, 체념주의와도 일맥 상통하는 것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그 순간 당신이 참으로 가련하고 측은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연세대 교수 송복이라는 사람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 사람이 며칠 전 <조선일보>에 쓴 조선일보를 옹호하는 '시론'이라는 글에서 K형 당신과 비슷한 참으로 오묘한 말을 했지요.
언론사에는 어느 정도의 비리가 필요하다는 말이었지요. 그리고 비리가 없으면서 정부를 비판하지 않는 신문보다는 약간의 비리를 안고서도 용감하게 정부를 비판하는 신문이 차라리 낫다는 요지의 말도 했지요.

세상이 하도 요지경이다보니(이놈의 요지경 세상을 조선일보 등 족벌 신문들이 만들었다는 혐의도 참으로 농후하지만) 소위 대학교수라는 사람의 입에서 이렇게 오묘하고도 포복절도할 요설이 다 나오고 난무를 하니, 이런 세상을 산다는 게 나로서는 참 너무도 힘든 것 같습니다.

그 송복이라는 양반에게 묻고 싶은 게 있소. 자기 자식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고, 학생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는지를…. 만약 그가 시험 문제를 '언론사에는 어느 정도의 비리가 필요하다고 보는가, 그렇지 않다고 보는가'라고 출제를 했다고 했을 때, 학생들이 '그렇지 않다'라고 적거나, '비리가 없으면서 정부를 비판하는 신문도 존재할 수 있다'라고 적는다면, 그 답들을 모두 오답으로 처리할 것인지? 나는 그것이 궁금하기 짝이 없소.

나는 정말이지 그런 사람이 대학교수라는 사실이 너무도 서글프오. 마치 대학교수 사회에도 어느 정도의 비리가 필요하다, 연구 논문을 사고 팔고 하는 일도 있어야 대학이 제대로 돌아가고, 그것이 현실이다, 라는 소리로도 들리는 것만 같고….

얼마 전에는 또 어떤 교수가 철저히 한나라당 편인 조선일보를 두둔하려는 뜻인지 이런 말을 했지요.
"우리 나라도 미국이나 유럽처럼 신문이 어느 한 정당에 대한 지지를 노골적으로 표명할 수 있어야 하고, 차라리 그러는 편이 바람직하다."
언뜻 보기엔 그럴 법한 말이오. 그렇지만 우리의 사정은 서구 사회의 사정과는 너무도 다르지요. 그들은 정당의 정책에 대한 지지 표명이기에 신문의 그런 태도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우리는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요? 우리는 천박한 지역감정이며 색깔론이며 온갖 잡스러운 것들이 다 얼키고설킨 상황이기 때문에, 그리고 정의와 불의의 차원이기 때문에 서구 사회의 그것은 아직 그림의 떡일 뿐이지요.

참으로 완강하게 스스로 보수 꼴통임을 내세우시는 K형.
보수 집단임을 자처하는 우리 나라의 수구 정당에 진정으로 보수할 만한 가치―정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있을까요?
그들이 조장하고 믿고 의지하는 지역감정이라는 것이 정녕 보수할 만한 가치일까요?

그들이 다수 국민의 통일에의 꿈을 훼방하고 폄하하며 분단 고착화를 추구하는 것이 과연 보수할 만한 가치일까요?
통일은 무력으로써만 가능하다고 하는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냉전 사고와 논법이 과연 보수할 만한 가치일까요?
정치 권력을 능가한다고 큰소리칠 정도의 족벌 신문들의 뒤넘스러운 권력과 비리 구조, 세금 포탈 행위들이 과연 보수할 만한 가치일까요?

그리고, 그런 것들이 보수할 만한 가치로 횡행하는 사회가 과연 올바른 사회일까요?
그런 사회를 길이길이 유지 보존해서 우리 자식들에게까지 물려 주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어제도 오늘도 보수 꼴통임을 자처하고 강조하시는 K형.
나이는 당신이 나보다 몇 살 위지만 초등학교 동기동창이니, 이왕 얘기를 벌인 김에 몇마디만 더 하겠소.
나는 젊은 시절 4, 50대 연령층의 꽉꽉 막힌 가치관에 절망한 나머지 세월이 빨리 흐르고 저 늙다리들이 빨리빨리 죽어 없어져야 민주주의가 제대로 자리잡히리라는 매우 과격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요.

그런데 내가 막상 50대 초중반의 나이에 이르고 보니, 세상이 많이 변한 가운데서도 4, 50대 연령층의 콱 막힌 가치관이 여전히 울울창창한 것을 느껴야 하는 심회가 무척이나 괴롭소.

그리고 나는 지금도 종종 젊은 시절에 들었던 뼈아픈 경구 하나를 떠올리곤 합니다.
"앞에서 싸우는 사람이 가장 먼저 죽고, 뒤에서 돕는 사람이 다음에 죽고, 아무것도 안하고 구경만 한 사람은 살아 남아서 죽은 사람이 심은 나무의 과실을 차지한다."

나는 지금 당신 같은 수구 꼴통들과 족벌신문들의 오지랖에 가득 가득한 과실들을 봅니다. 우리가 민주화를 위해 피흘리며 살았던 저 암울한 고난의 시절 내내 아무것도 안하고 구경만 했던 대가, 오히려 방해를 하고 얻은 대가, 수많은 민주 열사들이 목숨 바쳐 심은 나무에서 따들인 그 과실들을 보며 무수한 영령과 생령들의 신음을 듣습니다.
당신네들의 오지랖에 가득한 그 민주라는 이름의 과실들이 당신은 가엾지도 미안하지도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초등학교 동기동창님 K형.
마지막으로 우리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 한 도막을 떠올려보기로 하지요.
시오리 길을 달음박질로 학교에 오던 아이들도 많았던 그 시절, 자연 매일같이 지각생들이 많았지요. 하루는 담임 선생님께서 지각생이 많은 문제에 대해 몹시 야단을 하시더군요.
그런데 나는 그때 이상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으로부터 정작 야단을 맞아야 될 아이들은 지각을 하거나 결석을 해서 야단을 모면한 반면 지각을 하지 않은 아이들이 대신 고스란히 야단을 맞는 형국―그것에 대한 인식이었지요.

다음날에는 선생님이 다시 야단을 치시지 않아서, 나의 억울하고도 이상 야릇하기만 한 심정이랄까―그 기억은 내 뇌리에 깊이 각인이 되고 말았지요.
아아, 정작 혼나야 될 아이들은 자리에 없어서 혼나지 않고, 혼나지 않아도 될 아이들은 자리에 앉아 있는 죄로 남의 몫까지 대신 덮어쓰고 혼이 나는 현실―!

그것이 상징하는 현상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당신 같은 사람은 여전히 각성과 고뇌의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여전히 수구 꼴통임을 자처하면서, 고작 내년의 대선 때 보자고 벼르며 큰소리나 치고, 나 같은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당신 몫까지 떠맡아 고뇌하며 살아야 하니, 참으로 얄궂다 싶은 심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절대로 낙담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습니다. 당신 대신, 당신의 몫까지 고뇌의 짐을 지고 갈 사람은 나 말고도 우리 사회에 무수히 많으니까요.
어떤 사람이 나를 욕하면서 내 긴 글에 대해 "한번 늘였다 하면 아라사 말좆같이 늘어지는∼" 어쩌고 흉을 보았습니다만, 나로 하여금 이런 일을 하게 만든 당신이야 이 긴 글을 읽지 않을 테지만, 당신 대신 읽어주고 고뇌의 짐을 나누어 지고 저 개혁 결실의 땅을 향해 함께 갈 사람들은 무수히 많으니까요.

다만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오늘의 이 노고를 훼방하고서도 당신이 훗날 차지하게 될 그 과실이 필경은 당신의 오지랖까지 또다시 가득 채우게 되리라는 사실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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