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학교의 여름방학이 끝났습니다. 여름방학이 끝나니 우선은 내가 제일 살판이 났지 싶습니다. 아내와 두 아이가 아침만 먹으면 서둘러 학교로 내빼니 조용해진 집안은 온통 내 세상이고, 컴퓨터도 하루종일 내 차지가 됩니다. 컴퓨터 쟁탈전을 벌일 일이 없으니, 집이 비좁고 컴퓨터가 한 대뿐인 것을 놓고 지독하게 '언걸먹은' 내 신세 한탄을 다시 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 녀석의 방학숙제―그 짐들이 좀 거창해서 개학하는 날(27일) 아침에 내가 수고를 좀 해주었습니다. 내 승합차로 학교 앞까지 태워다준 거지요. 방학숙제 짐들을 안고 학교로 들어가는 아들 녀석은 적이 의기양양한 기색이었습니다.
아들녀석의 방학숙제들 중에는 '족보판'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실은 아들녀석 혼자 만든 것이 아니지요. 엄마는 물론이고 누나와 아빠까지 돕고 거들어서 겨우 완성할 수 있었던 거지요.
삼등분으로 접을 수 있게 이어붙인 커다란 그림판에다 큰 나무 한 그루를 그리고 그 나무의 가지들에 사람의 이름자들을 붙여 만든 족보판은 그 형형색색의 정성만큼 썩 보기도 좋았습니다.
나무의 굵은 밑둥에는 컴퓨터로 뽑은 내 조부모님의 이름 딱지가 붙여졌습니다. 그리고 네 개의 굵은 가지들에는 내 부모님과 백부모님들과 숙부모님의 이름 딱지가 붙여졌습니다. 물론 그 네 개의 굵은 가지들에서는 또 여러 개씩의 가지들이 뻗어나고, 그 뻗어난 가지들마다 다시 더 많은 가지들이 뻗어나고….
그 모든 가지들마다 사람들의 이름 딱지들이 붙여지니, 그리고 그 이름 딱지들은 형형색색의 꽃 모양을 하고 있으니, 그 큰 나무는 참으로 아름다운 나무였습니다. 100송이도 넘는 크고 작은 꽃들이 함빡 피어 있는 화려하고도 우람한 나무였습니다.
겨우 4대, 8촌까지만 이름 딱지를 만들어 붙였을 뿐인데도 (출가한 여자들과 배우자들의 이름까지 적어서 더 그렇겠지만) 참으로 많은 이름 딱지들이 촘촘하게 붙여져서 그야말로 덩실하고 우람한 나무―그런 나무 모양의 족보판이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아들녀석은 그 족보판을 완성한 날밤, 그것을 거실 벽에다 걸어놓고 신기한 듯이 바라보곤 했습니다.
신기하기는 50여 년 세월을 살고 있는 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는 그 족보판을 바라보면서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회에 깊이 젖어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선 가만히 살펴보니 우리 충주(忠州) 지문(池門)과 연분을 맺고 있는 성씨가 무척 많았습니다. 김씨, 심씨, 박씨, 최씨, 이씨, 편씨, 구씨, 임씨, 장씨, 강씨, 정씨, 채씨, 배씨, 한씨…. 내가 선 자리에서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성씨만도 14개 성씨나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배우자들의 출신지를 떠올려보니 제주도만 빼고 남한 5도가 다 모여 있는 셈이었습니다. 강원도,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까지….
우리집만으로 범위를 좁혀도, 어머니(최씨), 아내(구씨), 매형(채씨), 매제들(김씨, 배씨, 한씨), 두 제수씨(강씨, 김씨) 등 8개 성씨들이 연분의 실타래를 이루고 있는 셈이었고, 또 어머니(전주), 첫째 매제(마산), 둘째 매제(서울), 막내 매제(인천)―이렇게 4개 지역 출신 사람들이 충청도에 터잡고 있는 집과 인연의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것들을 그제서야 실감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아들녀석이 엄마와 함께 이틀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방학숙제 족보판―거실 벽에 걸린 그 족보판 앞에서 참으로 그런 감회를 만끽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충주 지가인 내가 수많은 성씨들과 인연을 맺고 한 덩어리로 어울려 살고 있음이, 그리고 충청도 태안 사람인 내가 다른 여러 지역 출신 사람들과 인연의 또아리를 틀고 살아가고 있음이 너무도 기분 좋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대한민국 사람일 수 있고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조금은 모호하다 싶은 생각도 절로 드는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나는 되우 기분이 좋았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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