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젊은 엄마는 왜 아이들 냄새를 싫어할까?

등록 2001.10.19 14:42수정 2001.10.19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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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성모병원에 입원하신 어머니를 간병하는 일로 대전에 머물 때의 일입니다.


하루 연가를 얻은 고등학교 교사인 막내동생과 손을 바꾸고 동생 집에 가서 몇 시간 휴식을 한 다음 오후 4시쯤 병원으로 돌아갈 때 였습니다.

17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15층 쯤에서 엘리베이터가 멎더니 세 사람이 타더군요. 엄마인 듯한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자와 유치원 생쯤으로 보이는 사내아이와 초등학교 고학년일 것으로 짐작되는 여자아이. 그들의 모습이 오붓하고 환하게 보여서 나는 괜히 흐뭇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나도 딸과 아들을 두고 있는 사실이 냉큼 절로 상기되고.

내 비록 나이 사십에 결혼했을망정 완벽하게 실력 발휘를 해서 정확히 열 달 만에 아이를 낳았는데, 낳고 보니 내가 바랐던대로 딸이더군요. 나는 위로 누님 한 분을 두었는데, 누님의 시집전 어머니 같은 구실 등 첫째인 누님에 대한 부모님의 사랑을 잘 기억하는지라, 정말이지 내 첫아이가 딸이기를 바랐답니다.

둘째 아이를 가졌을 때는 은근히 긴장을 했지요. 뭐가 됐든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로 고맙게 받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내는 둘째 아이를 가진 날부터 자주 어머니 방을 들락거리며 벽에 걸려 있는 내 선친의 사진을 보곤 했지요.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할아버지를 빼닮은 아들이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랬다더군요.

그러니까 아내는 아들만 바란 게 아니라, 그 녀석이 못생긴 아빠보다 잘생기신 할아버지를 닮기를 바랐던 거죠. 내 못생긴 상판이 다시 한번 요상하게 확인된 셈이기도 해서 섭섭한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절로 삼삼해지는 기분이더군요.

아내의 그런 갸륵한 기원이 통했는지, 둘째 녀석을 낳고 보니 보고 또 보아도 좋은 고추인 데다가 얼굴 윤곽이 벌써 제 할아버지 판이더군요. 녀석이 점점 커가면서 할아버지 닮은 모습이 더욱 뚜렷해지니, 내 선친을 기억하시는 분들의 입에서, "녀석이 지 애비를 젖혀놓구 할아버지를 닮아버렸네"라는 말도 나오더군요.


나는 이중 삼중으로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지요. 녀석이 고추여서 좋고 잘생겨서 좋고 할아버지를 빼 닮아서 좋고.

잠시 그런 아삼삼한 기분에 젖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15층쯤에서 동승을 한 그 오붓하게 보이는 가족 중에서 여자아이가 제 엄마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더군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들어보니, 제 친구들이 저희 집에 놀러와도 되느냐고 묻는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엄마의 반응이 너무도 의외였습니다.


"뭐라켔노, 지금? 안된다, 고마."
너무도 즉각적이고 신경질적인 엄마의 반응에 아이는 기가 죽었지만,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한마디를 더 했습니다.
"두 명밖에 안되는데…."
"안된다카이. 내는 그런 거 몬한다."

여기까지는 평범할 수 있는 얘기였습니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그런데 그 엄마의 다음 말이 참 놀라웠습니다.
"냄새 나서 안된다."

그러자 딸아이가 좀더 풀죽은 소리로 한마디를 더 했습니다.
"향수 바르고 오면 되는데…."
"안된다카는데, 이기 와 자꾸…."

나는 그 엄마가 느낄 수 있도록 일부러 소리나게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아이에게 말을 걸 생각을 했습니다.
'넌 네 친구들 집에 놀러가지?'

그러나 그 말을 하기도 전에 엘리베이터가 멎고 문이 열렸습니다. 그 젊은 엄마는 사내아이의 손을 잡고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나가고 아파트 현관을 나갔습니다. 그 엄마의 뒤를 여자아이가 힘없는 걸음으로 따라가고.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가는데, 그 여자아이의 가엾은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서 가슴이 아프더군요. 그 젊은 엄마의 야박한 경상도 말씨가 자꾸만 귀에 들리는 듯싶어서 나도 모르게 몸이 곱송그려지는 것만 같고….

그로부터 며칠 후 나는 다시 동생네 아파트 마당에 차를 놓게 되었습니다. 차에서 내리니 401호 아줌마가 세 살배기 내 조카녀석을 데리고 아파트 현관을 나오더군요. 부부교사인 내 막내동생네의 작은 녀석을 낮동안 맡아주는 마음씨 좋게 생긴 아줌마였습니다. 이미 구면인 그 아줌마와 인사를 하고 내 어린 조카녀석을 잠시 안아주는데, 경상도 말이 들렸습니다.

"빨리 가지 않고 뭐하노."
며칠 전에 보았던 그 몰인정한 젊은 엄마였습니다.
나는 401호 아줌마에게 물었습니다.
"저 아줌마랑 워디 같이 가신대유?"
"잠깐 놀러 갈 집이 있어서요."
"아, 예. 그러시구먼유."

나는 괜히 고개를 끄덕이며 또 괜히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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