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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 다음날인 26일 일반 병실로 옮긴 어머니는 29일 밤에 배변(장의 활동이 시작되어 장 안에 있던 핏물이 나온 것인 듯)을 했고, 30일 비로소 물을 마시기 시작했지요. 그러나 그렇게 마시고 싶던 물도 막상 마시려니 겨우 두 모금 정도….
10월 1일은 추석날이었지요. 추석날 아침부터 어머니께는 미음이 공급되었습니다. 명절날 아침부터 어머니의 병상에도 식사 쟁반이 올려지고 어머니가 숟가락을 쥐게 되었다는 사실이 내게 좀더 각별한 느낌을 안겨 주는 것 같았습니다. 태안에서 대전의 막내동생네로, 그리고 성모병원으로 이동해온 우리 삼형제 가족은 그래서 올 추석을 더욱 기쁘고 즐겁게 맞은 셈이었습니다.
나는 미음을 드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순간 어머니의 병상을 지켜온 그 동안의 모든 노고가 일시에 말끔히 사라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병상 곁에서 새롭게 느끼고 반추했던 여러 가지 상념이며 회억들이 다시금 하나 하나 환하게 마치 연등처럼 떠오르는 기분이기도 했습니다.
무려 여드레만에 다시 숟가락을 쥐신 어머니의 모습을 보자니 다시금 불현듯 떠오르는 그림이 있었습니다. 40년하고도 몇 년이 더 굽이쳐 흐르고 있는 그 세월의 강 저편에서 지금도 영롱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당연히 내 초등학생 시절이겠지만, 몇 학년 때였는지는 기억이 분명치 않습니다. 거지들이 여럿 거리를 배회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무렵 늙수그레한 남자 거지 한 사람이 우리집을 찾아왔습니다. 거리에서 자주 보는 낯익은 거지가 아니었습니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그 거지는 대문 밖에서 문 안으로 깡통을 들이밀고 있었습니다. 부엌에서 저녁을 짓던 어머니가 나오시더니 양철 대문을 열고 그 거지를 집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 거지를 마루 위로 올라앉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유. 상을 차려다 드릴 테니께, 뜨건 국물허구 뜨뜻헌 밥을 뜨뜻허게 잡숫구 가세유."
누님과 나와 누이동생은 그 거지가 마루 위로 오를 때 더러운 검정 고무신에서 뽑혀진 시커먼 맨발을 보면서 하나같이 얼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런 더러운 거지를 마루로 올라앉게 하는 어머니의 처사가 못마땅해서 절로 입술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곧 잘 차린 상을 들고 부엌에서 나왔습니다. 사기 그릇에 보리밥이나마 고봉으로 퍼담은 밥에서는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무와 갈치를 크게 썰어 넣고 뻘겋게 지진(끓인) 국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피어오르고…. 어머니는 그 밥상을 거지 앞에 놓아주며, "많이 잡수세유. 가져가실 밥일랑은 따루 디릴께유"하고는 그 거지 옆에 있는 동냥 깡통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예, 고마유. 시상이 이렇게 고마울 디가…."
웅얼거리는 소리로 겨우 말하고 거지는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참으로 달게 먹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들은 그 거지의 밥 먹는 모습을 지켜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시하는 것은 그 거지가 사용하는 숟가락이었습니다. 그 숟가락과 젓가락을 우리는 하나같이 눈여겨 보았습니다.
숟가락조차도 여유가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날 저녁부터 우리 가족의 식사 자리에서는 진풍경이 벌어졌습니다. 그 거지가 사용했던 숟가락을 용케도 알아본 우리들은 서로 그 숟가락을 차지하지 않기 위해 경쟁을 벌였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숟가락과 젓가락은 따로 정해져 있고, 조무래기 동생들의 숟가락은 쉽게 표가 나는 작은 것들이어서, 누님과 나와 내 바로 아래 누이는 그 거지가 사용했던 숟가락을 차지하지 않으려면 경쟁을 벌어야 했습니다.
그것을 눈치챈 어머니가, "그럼, 오늘부터 이 숟가락은 엄마 꺼다인"하고는 그 숟가락을 들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어머니를 경이로운 눈으로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그 풍경을 떠올리면 입가에 절로 웃음이 그려집니다. 즐겁고도 그리운 풍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병상의 머리맡에 놓여진 어머니의 묵주를 볼 때는 어머니의 '새벽 촛불'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집에서의 어머니는 하루도 변함없이 새벽마다 촛불을 켜놓고 기도를 하시곤 했습니다. 일상적인 기도와 몇 가지 특별 지향의 기도를 마치고는 매일같이 '묵주 기도'를 15단씩 바치시므로, 그만큼 초 소비도 많은 편이지요.
나는 어머니의 그 새벽 촛불을 볼 때마다 내 가슴이 신선해지는 것을 느끼곤 했습니다. 할머니 방에서 잠을 자는 내 딸아이도 할머니의 그 새벽 촛불을 보는 날들이 있기를 소망했습니다. 우리 부부의 편안한 잠자리를 위해서보다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아들녀석도 할머니의 방에서 자게 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아이들이 지금 당장에는 그 촛불에서 아무런 느낌도 얻지 못한다 해도 아이들의 뇌리에 그것이 확실하고도 좋은 영상으로 새겨지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할머니의 사랑의 입김, 자상한 손길, 포근한 품속이 아이들의 가슴에 바다 같은 물결을 안겨줄 것으로 나는 믿었습니다. 늘 살아 움직이는 물결을….
아이들이 새벽마다 기도하시는 할머니의 촛불을 보는 날들이 있으므로 아이들의 뇌리에서 그 새벽 촛불은 평생 동안 아련히 타오를 것으로 나는 믿었습니다. 참으로 나는 확신합니다. 내 아이들에게는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평생 동안 아련한 정으로 남아 있게 될 것임을….
나는 내 아들 녀석이 몇 년 전에 보여 주곤 했던 모습을 기억하는 것도 즐겁습니다. 아들녀석이 지금은 그러치 않지만, 몇 년 전에는 밤에 자주 배탈이 나곤 했지요. 녀석이 배아픈 소리를 하면 잠귀 밝은 내가 먼저 잠을 깨고, 녀석이 화장실에 가서 구토를 할라치면 건넌방의 할머니가 일어나 나오시지요. 그런 판국에도 아내는 세상 모르고 자고 있고….
화장실을 다니며 낑낑대던 녀석이 결국 가는 곳은 할머니 방이지요. 녀석은 할머니 옆에 누워 할머니의 약손으로 배탈을 가라앉히며 곧 편안한 잠 속으로 빠져들고….
그럴 때마다 나는 녀석이 느끼는 할머니에 대한 감정 세계가 궁금하곤 했습니다. 배아픈 어린 손주녀석이 할머니의 품으로 파고드는 저 두메산골의 덤부렁듬쑥한 풀숲 속 같은 아늑한 정의 세계가 아직 내 어머니의 방에는 가득하다는 것을 절감하는 까닭에….
나는 어머니의 병상 곁에서 어머니의 존재가 참으로 크고도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 느끼고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병환으로 말미암아 7남매―모든 아들딸들이 일치 단결하는 모습을 연출했던 것도 재미롭게 생각됩니다.
서산의료원과 대전성모병원을 다녀간 것은 물론이고 매일같이 전화로 상황 파악을 한 누님과 매형, 미국에서 치료비를 보내주고 자주 전화와 메일로 성원을 보내준 첫째 누이 부부, 두 차례나 병원에 와서 이삼일씩 간병 수고를 해주고 돌아가곤 한 가운데 누이, 오랜만의 전화로 어머님께 각별한 기쁨을 드린 미국 LA의 막냇누이, 수술이 잘 되었다는 소식에 울먹이는 전화로 시어머니에 대한 정을 표현한 큰제수씨, 대전에서 금산으로 출퇴근을 하는 피곤한 몸으로도 휴일과 밤에 많은 시간 병실을 지켜 주고 아침마다 시아주머니의 끼니를 챙겨 날라다준 막내 부부, 하루 연가를 얻어 와서 밤새 간병을 하고 돌아가고 맏며느리로서의 소임을 다하고자 애쓴 내 아내….
병상의 어머니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모든 아들 딸 며느리 사위들의 그런 모습은 가히 입체적이었지요. 비록 삶의 전체적인 모습을 놓고 볼 때는 이승에서 연옥을 사신 것이 참으로 분명할지언정, 병상에서나마 자식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런 대로 행복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늙구 병들었어두 자식들이 많구 하나같이 효성이 지극해서 행복헐 지경인디, 자식을 많이 낳지 않는 세상이 돼놔서…자식이 아예 읎거나 달랑 하나만 낳구 사는 사람들은 어떡헐지 물러…."
병상에서 이런 걱정을 하시는 어머니의 말이 우스우면서도, 나 역시 슬며시 괜한 걱정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시민이 되어 있는 내 바로 아래 누이는 고국에 쉽게 올 수 없는 처지임에도, 어쩌면 그래서 더욱 어머니 생각에 노심초사했는지도 모릅니다. 꿈에도 그리운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에게는 크나큰 위안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같은 LA에 살면서도 언니네와 소원했던 막내누이도 이번 일로 다시 언니네와 내왕을 하게 되었답니다. 내가 어머니 소식을 담아 보내는 메일을 형부가 받아서 프린트를 해 가지고 전해주는 일을 하니 자연스럽게 접촉을 하게 된 거지요.
정말이지 어머니의 병환은 자식들 사이를 더욱 가까워지게 했고, 일치 단결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사실을 어머니는 다행스러워하시고….
어머니가 퇴원하신 10월 8일은 어머니의 78회 생신일이었습니다. 나는 주치의 김지연 교수로부터 어머니의 퇴원일을 확인 받았을 때, 그날이 어머니의 생신일이라는 사실에 참으로 기분 좋은 질감을 맛보았습니다. 그것 또한 하느님의 축복이리라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12일 어머니를 모시고 다시 대전성모병원에 가서 퇴원 후 1차 외래 진료를 받을 때 암세포에 대한 조직 검사 결과를 알 수 있었습니다. '전3기'라고 하더군요. 수술하던 날 주치의 김지연 교수가, "생각보다 병이 심하지 않더군요"라고 한 말에 크게 위안 받고 잔뜩 기대를 걸었었는데…. 임파선에 전이된 상태여서 앞으로 2년 동안 병원에서 '관리'를 해야 한다더군요. 항암제를 복용해야 하고….
그런 상황이긴 하지만, 말기암 상태가 되기 전에 발견을 하고 수술할 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항암 치료를 하되, 주사제 사용까지는 하지 않게 된 것을 또한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2년 동안 치료가 잘 되어서, 내 어머니가 연세 여든을 넘기면서부터는 더욱 건강하게―암세포에 피를 빼앗기지 않으니 한결 좋은 기력으로 사시게 되리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 동안 병실을 찾아주시거나 전화나 메일로, 그리고 그 외의 방법으로 격려와 위로를 베풀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제 노모를 위하여 '축복미사'를 봉헌해주신 태안 성당의 여러 형제 자매님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병실을 자주 찾아주신 대전성모병원 원목실의 부제님과 수녀님들 고맙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제 노모를 진료해주신 대전성모병원의 내과전문의 이강문 교수님, 일반외과의 김지연 교수님을 비롯한 의료진 여러분께도 뜨거운 마음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참으로 친절하고 자상하게 환자들을 돌보아주시는 대전성모병원의 모든 간호사님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대전성모병원의 9층(외과병동)의 916호 준중환자실과 912호실에 남아 계신 환자님들이 조속히 쾌유되시어 기쁘게 퇴원하시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대장 수술이라는 큰 고통을 겪으신 내 어머니께서 건강해지신 몸으로 여생을 편안하고 기쁘게 사실 수 있도록 더욱 충실히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할 것을 여러분께 약속 드리겠습니다.
이 글이 연재되는 동안 이 글을 읽고 위로와 격려, 그리고 축원을 베풀어주신 모든 분들께도 머리 숙여 감사 드리며, 여러분 가정에 하느님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끝으로 제가 지난 1993년 9월 26일 태안 성당에서의 어머님의 칠순 축복 미사 때 직접 낭송했던 '헌시' 한 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치겠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 드리며….
어머니 얼굴의 주름살 속에는
―고희를 맞으신 어머님께
어머니, 당신의
얼굴 가득한 주름살을 보노라면
새삼 내 가슴은 저 *장명수 바다
엉망진창 뻘밭이 됩니다
어느 날 어머니의 얼굴을 볼 땐
하느님의 심술이 느껴져
내 마음에도 심술이 돋았습니다
착한 사람에게는 더 많은
가혹한 시련으로 시험하신다는
경우 없으신 하느님
평생을 주변머리 없이
가난 속에서 살다 가신 남편과
아버지를 닮은 자식들은 탓할지언정
한 번도 하느님 원망하는 법 없이
밤마다 촛불로 새벽을 태우며
예수님의 신발 끈을 잡으려는 당신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어
고희를 맞으신 오늘에도
육신 편할 날 없고 마음 고생 지극하신 어머님
신앙심이 없었다면 진작에
심신이 무너졌을 어머님
이왕 이승에서의 박복을 신앙으로 견딘다면
어머님 당신이 하느님 앞에 가져가실 것은
쭈그렁 밤톨 같은 얼굴의 주름살뿐입니다
심술궂은 하느님도 다른 것은 다 버리고
당신의 주름살만은 꼭 살펴보실 것입니다
착하고 바르게 산 일생
애옥살이 고통에 눈물지으면서도
더 불행한 사람들이 많음을 알고
은밀히 병자의 자리 밑에 손을 넣곤 한 선행
하느님께 바칠 것을 가장 중히 여긴 심성
새옷 한가지 입을 때마다
그저 마음 걸려 한 그 모든 것들이
당신의 주름살 속에 다 들어 있을 것입니다
평생을 신앙으로 살아 왔고
오늘의 고난 고통도 신앙으로 견디시는
용한 나의 어머니!
*장명수: 충남 태안읍의 작은 뻘밭 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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