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는 널 위해 기도했단다"

헤픈 내 가을의 눈물

등록 2001.10.21 13:53수정 2001.10.25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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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의 어머니가 잠드신 것을 보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살며시 병실을 나갔습니다. 6인용 병실 5개의 병상에 환자들이 있어서 어머니의 잠을 깰 수 있는 요인은 많은 셈이었지만, 나는 어머니 곁에서 휴대폰이라도 울리지 않도록 할 요량이었습니다.


간호사실 앞을 지나 복도의 한쪽 끝으로 갔습니다. 층계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층계 옆에는 창문도 있어서 바람이 잘 통하는 곳이었습니다. 비교적 너른 공간에는 의자들도 있어서 그 시원한 곳의 의자에 앉아 잠시 졸음이라도 즐겨볼 생각이었습니다.

창문 반대편 의자에 두 모녀가 앉아 있었습니다. 삼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엄마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1년쯤일 것으로 짐작되는 여자아이…. 아이는 환자였습니다. 한쪽 팔에 깁스를 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 팔에는 링거 줄이 걸려 있었습니다.

나는 네 개 모두 비어 있는 창문 쪽의 의자에 앉아서 맞은편의 그 모녀를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첫눈에 그들이 엄마와 딸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누가 보더라도 모녀간임을 느낄 수 있게 하는―이 세상에서 가장 정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여자아이는 예쁜 얼굴에 앙증맞은 모습이었습니다. 한번 안아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하고 있는 모습은 나로 하여금 절로 웃음을 머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엄마가 깡통같이 생긴 플라스틱 그릇에서 액체로 된 뭔가를 아이에게 떠먹이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자신이 환자라는 것이 고통스럽기는커녕 오히려 즐겁기만 한 것 같았습니다. 팔에 깁스를 하고 링거 바늘을 꽂고 있는 것이, 무슨 큰 벼슬이라도 하고 있는 양이었습니다. 턱 버티고 앉아서 두 다리를 앞뒤로 흔들거리며 음식을 먹는데, 그저 엄마의 손이 올 적마다 입만 벌리면 되었습니다.


나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그들 모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그들 모녀가 너무도 행복하게 보였습니다. 어쩌면 저 아이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저 아이가 하고 있는 모습은, 동작 하나하나는 그 행복한 마음의 구체적인 표현일 터였습니다. 그 행복의 기운은 엄마의 모습에서도 여실히 풍겨나고 있었습니다.

나로서는 어떤 사고였는지 모르지만, 아이가 그만하기 다행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나도 그런 마음인데, 엄마로서는 그런 마음이 얼마나 클까? 사고 순간 얼마나 놀랐고, 얼마나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쓸어 내렸을까? 어쩌면 저 엄마는 사고 순간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에 감사의 눈물을 흘렸을지도 몰라. 하느님이나 부처님이나 또 누구에게든 감사의 기도를 했을지도 몰라. 아이에게 음식을 떠 먹여 주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속으로는 감사의 기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런 생각을 하고 난 다음 순간, 나는 혼자 가만히 성호를 그었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 아이를 더 큰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오늘의 저런 행복한 시간을 저들에게 베풀어주심에도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는 눈을 감고 앉아서 좀더 기도를 했습니다. 하느님, 저 아이에게 부모를 잃는 불행이 생겨나지 않도록 돌보아 주십시오. 저 엄마에게 아이를 잃는 슬픔이 생겨나지 않도록 보살펴 주십시오. 저들 모녀가 이 세상에서 오늘 같은 행복을, 사랑과 효성을 길이 나누며 아무런 위난도 당하지 않고 살도록 은총 베푸소서.

그런데 기도를 마치고 난 다음 순간 내 눈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기도를 하던 한 순간, 한 달 전쯤에 졸지에 고아가 되어 버린 우리 동네 두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남자아이들로서 형제였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과 초등학교 6학년….

그 아이들의 부모는 사십대 초중반이었고, 아버지는 건설업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최근에 운전 면허를 취득하였지요. 그들 부부가 대전에 갔다가 돌아오던 밤길이었답니다. 술을 마신 남편이 초보인 아내에게 운전대를 맡겼지요. 초보 아내가 밤길 운전을 하며 오다가 천안 근방에서 그만 중앙선을 넘었다더군요. 트럭과 충돌하여 현장에서 그만….

졸지에 고아가 되어 버린 그 아이들을 나는 바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나이 오십이 넘도록 여전히 눈물이 헤픈 나 자신을 다시 한번 실감하며 그저 마음 속으로 그 어린 형제를 위해 기도만 할 뿐이었는데, 그때처럼 기도라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때는 없었습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도대체 이 기도가 저 불행한 어린 형제에게 무슨 소용일까! 하는 생각만이 내 뇌리에서 맴을 도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도 간간이 그 어린 형제를 생각할 때마다 성호를 그으며 하느님을 뇌곤 하였지만, 그 어린 형제를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무력감만 되새길 뿐이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무슨 일을 한다 한들, 그 아이들은 나에게서 부모의 만분지 일만큼만이라도 부모 체취를 느낄 수가 있을까? 진정한 위안이 될 수 있을까? 도리어 더 큰 슬픔만 안겨 주는 것은 아닐까?

추석 명절이 다가오는 시점이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올 추석을 어떻게 지낼까? 부모 없는 추석을, 새파랗게 젊은 부모의 묘소에 성묘를 하게 될 줄을 그 아이들은 꿈엔들 상상이나 했을까? 아아, 그 아이들은 올 추석을 어떻게 보낼까?

그런 생각을 하니, 내 눈에서는 더욱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눈물은 나에게 좀더 이상한 사물이었습니다. 눈물 그 자체로 머물지 않고, 자꾸만 엉뚱한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눈물이 상념을 부르는 형국인 거지요.

한번 눈물이 솟은 이상 도리 없는 일이었습니다. 8년 전 내 어머니의 칠순 생신날 잔치하던 야외 음식점의 연못에 빠져 하늘나라로 가버린 네 살배기 조카녀석의 그 눈감은 모습이 다시금 어제 일처럼 떠오르는 것은…. 그리고 졸지에 첫아이를 잃은 슬픔에 넋이 나간 것만 같았던 동생 부부의 그때 그 모습이 떠오르는 것도….

나는 결국 내 선친의 어렸을 적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여섯 살에 아버지를, 아홉 살에 어머니를, 그렇게 조실부모했던 내 아버지의 어렸을 적 슬픔을…. 몇 년 전 선친의 유고 동화 작품들을 모두 찾아 정리하여 책으로 펴낼 때, 「봉길이의 무지개」라는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실부모하고 당숙댁에 얹혀 살고 있는 봉길이라는 소년의 모습이 바로 내 아버지의 어렸을 적 모습임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기에….

내 소년 시절에 보았던 어머니의 눈물도 나는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아버지와 어머니가 몹시 싸웠습니다. 무슨 일 때문에 싸웠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생활고가 원인이요 이유였으리라는 것은 거의 분명하지 싶습니다. 두 분의 다투는 소리가 울 밖으로 나갈 정도로 컸습니다. 나로서는 두 분이 싸우는 것을 그때 처음 보았습니다. 더구나 아버지가 홧김에 어머니의 뺨까지 때리는 것은…. 물론 그 후로는 그런 광경을 다시 보지 못하였지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시 싸우지 않은 것은 우리 생활이 좋아졌기 때문이 아니랍니다. 그 이유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한 가지 중요한 이유를 나는 조금은 즐겁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두 분이 몹시 싸우고 난 다음날이었지요. 어머니는 아버지로부터 처음 뺨을 한 대 맞은 서러움 때문에 밤새 잠을 못 이루고 흐느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은 상태였지요.

아버지가 나가고 없는 집에 반나절이 기울 무렵 근동에서 사시는 아버지의 이모님이 찾아오셨지요. 그 이모할머니는 내 어머니의 부은 눈을 보고 연유를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간밤에 아버지와 싸운 일을 실토했고…. 그러자 그 이모할머니가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웬만하면 참구 살어. 살기 어려운 거야 부부가 싸운다구 워디 가남? 알구 보면 자네 서방 불쌍헌 사람이여. 여섯 살 때 애비 여우구, 아홉 살 때 에미마저 여웠어. 그러구설래미 얼매나 고생허면서 산 줄 아나. 자네 서방 불쌍허게 큰 사람이여.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헌 게 부모 읎는 고아래잖어. 자네 서방이 고아루다가 서럽게 컸단 말여. 그러니께 그저 웬만헌 건 그냥 넘기면서 살어."

그때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나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더니 또 한바탕 마구 흐느껴 울더군요. 앞치마로 눈물 콧물을 닦아가면서…. 그날 이모할머니는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많이 들려 주셨지요.

이 삽화는 물론 내 기억만을 가지고 그리는 게 아니랍니다. 훗날 어머니로부터 들은 얘기들이 내 기억을 보강시켜 주어서 오늘의 이 삽화가 가능한 것이지요.

하여간 그날부터 어머니의 태도가 달라진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께 조금이라도 더 잘해 드리려고 애쓰시는 것을…. 내 어머니는 궂은 날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같이 장사를 나가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고질병인 신경통 때문에 중년 이후부터는 집에서 소일하신 내 아버지를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양조장을 다니셨지요.

아버지의 불우했던 소년 시절 모습들을 다시금 상상하고 회억하자니 나는 더욱 눈물이 솟았습니다. 이런 저런 사고로 졸지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 부모의 이혼으로 졸지에 버림을 받고 고아 아닌 고아가 된 아이들, 근흥면 마금리 김제훈 목사가 운영하는 <노아의 집>과 서산시 음암면 <한벨복지원>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려 내 시야가 좀더 흐려지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병상에 누워 계신 어머니가 수술은 잘 되었지만, 과연 완쾌되실지, 완쾌되신다 하더라도 얼마나 더 사실지, 우리 가족에게 사별의 슬픔을 안겨주며 영영 떠나시는 날은 언제일지, 그 슬픔이 멀지 않은 지점에 다가와 있는 것은 아닐지…자꾸만 그런 생각들이 벌불져서 내 눈물을 더욱 자극하는 것 같았습니다.

내 인생도 어느덧 가을…. 나는 과연 어느 지점에서 어떤 식으로 삶을 마감하게 될지, 아비의 죽음으로 당연히 자식들에게도 한 가슴 안겨지게 될 슬픔이 상상되고 문득 자식들이 가엾어지는 이 마음은 또 무엇이람.

고등학생 시절 단체 영화 관람을 할 때마다 울보라고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받았던 일이며, 텔레비전에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 장면을 보며 눈물을 흘리다가 지역에서 유지 행세를 하는 초등학교 동창 친구로부터 눈물이 너무 헤프다고, 김정일한테 이용당하기 똑 알맞겠다고 엉뚱한 핀잔을 들었던 일도 뜬금없이 떠올라 내 눈물을 더욱 자극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어느 사보(私報)의 청탁으로 금년 1월호에 '새해 소망'이라는 이름의 글을 썼지요. 인생 오십 고개에 이르도록 여전하기만 한 눈물 헤픈 심성을 고백하면서 올해는 더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되기를 소망한다고 썼지요.

이웃의 불행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눈물, 남북 이산가족들의 상봉을 보면서 흘리는 눈물…. 그런 눈물을 올해는 더 많이 흘리게 되기를 소망했지요. 간절히….

그러나 올해는 남북 이산가족들의 상봉 장면을 보면서 흘리는 눈물을 나는 아직 한 번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눈물을 아직 한 번도 갖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 우리 민족을 강제하는 매몰차고도 잔인한 현실이 나를 더욱 슬프게 합니다. 참으로 나는 그것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가족 상봉을 애타게 그리던 이산가족 1세대들이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점점 불귀의 객이 되어 가는 현실이 나는 못내 안타깝습니다.

민족이 함께 하는 눈물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것임을 나는 잘 압니다. 눈물이 통일을 가져오는 것은 아닐지라도, 전국의 '눈물바다'를 보면서 국민의 '안보의식 실종'을 개탄하던 <조선일보>의 돌심장과 냉혹한 호전성이 여전히 저 DMZ의 완강한 철책선 같다 해도, 그리고 아무리 김정일의 변덕이 죽 끓 듯한다 해도 우리는 그 눈물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더욱 계속적으로 눈물을 흘리게 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영안실의 곡성을 들었습니다. 왜 짬을 내어 거기를 갔었는지…. 영안실의 풍경을 보며 인생의 덧없음을 반추하였습니다. 그 덧없음 앞에서 좀더 겸허해지는 나 자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다가 얼핏보니 맞은편의 여자아이가 나를 보고 있었습니다. 의아한 표정이었습니다. 내가 빙긋 미소를 지어 보이니 그 아이는 어쩔 줄 모르는 듯하다가 제 엄마를 바라보았습니다. 뭐라고 하는데,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일어서서 그 아이에게 다가갔습니다.

"이 아저씨가 방금 뭘 했는지 아니? 널 위해서 기도했단다."
아이가 두 눈을 깜박거렸습니다. 한결 초롱초롱한 눈빛이었습니다.
"네가 더 많이 다치지 않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 기도를 했고, 너와 너희 엄마 아빠를 위해서 기도했거든."
"아저씨가 왜요?"
똑똑한 아이였습니다.

"하느님은 나 자신을 위한 기도보다 그런 기도를 더 좋아하시거든."
아이의 눈꺼풀이 또 한번 깜박거렸고, 아이의 엄마가 나를 보며 빙긋이 미소를 지었습니다. 고마워하는 눈빛이었습니다.

그때 내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경쾌한 소리로 울었습니다. 병상의 내 어머니가 아직 잠을 깨지 않으셨다면, 내가 휴대폰을 가지고 병실을 나온 것은 일단 잘한 일일 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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