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느 고장에나 그 고장을 대표하는 '명산'이 있듯이 내가 사는 충남 태안에도 백화산(白華山)이라는 이름의 명산이 있지요. 높이가 284미터밖에 되지 않는 작은 편에 속하는 산이지만, 온통 크고 작은 바위로 뒤덮인 모습은 특이하면서도 강건한 느낌을 안겨 주지요. 그 늠름한 모습에서 한결 친근한 느낌을 받는 이들도 많고, 온갖 모양의 바위들과 푸른 수목이 잘 어울려 있는 모습은 누구에게나 미산(美山)임을 느끼게 한답니다.
이 아름다운 산의 정상에 서면 누구라도 황홀한 기분을 맛보게 되지요. 태안읍의 전체 모습을 한눈에 굽어보면서 천수만 쪽의 드넓은 노해며, 비산비야 굽이굽이 이어진 땅자락 사이사이에 마치 호수처럼 들어앉아 있는 작은 만(灣)들이며, 먼바다의 섬들과 까치놀을 바라보는 기분은 참으로 각별할 것입니다.
거기에서 훤히 보이는 북쪽 가로림만의 풍광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동쪽을 향하고 서서 좌우로 가로림만과 천수만의 풍광을 살피다보면 당신은 아련한 신비로움과 황홀감 속에서 헤어나지 못할 겁니다.
백화산은 백두대간에서 뻗은 열세 개 정맥 가지 중의 하나인 금북정맥이 서산의 가야산을 거쳐 서해로 치달으며 팔봉산 망일산 흥주산에 이어 마지막으로 크게 용트림하듯 뭉쳐진 산이지요. 그래서 태안의 모든 정기가 집약되고 또 발원하는―태안의 심장과도 같은 산이랍니다. 그렇기에 백화산은 태안의 진산(鎭山)이기도 하지요.
나는 백화산을 자주 오릅니다. 바로 집 뒤에 산기슭 한 자락을 두고 사는 덕이지요. 중턱쯤의 낙조봉(落照峰)과 중턱 너머 움푹한 곳에 자리잡은 태을암(太乙庵, 마애삼존불이 있는 곳)을 거쳐 정상까지 오르는데는 40분이면 충분하답니다. 걸음을 태을암 바로 앞의 너럭바위까지로 한정한다면 오르고 내리는 동안이 1시간 남짓이니 산책을 겸한 운동으로는 적당하기가 아주 그만이지요.
나는 저녁 미사가 있는 날이라든가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은 거의 매일같이, 요즘은 오후 4시쯤에 산을 오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새벽에 산을 오르지만 나는 새벽 등산은 일부러 피합니다. 새벽 미사가 있는 날도 있고, 날 밝을 무렵에 동네의 가로등과 방범등들을 끄는 일도 해야 하고, 새벽이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에는 가장 좋은 시간인 탓이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과 섞이다보면 왠지 산에게 미안해지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지요. 태을암 너럭바위 위에서 담배를 피우고 꽁초를 함부로 버리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산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욱 커지고….
그래서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없거나 뜸한 저녁 무렵을 택해 산을 오른답니다. 태을암 옆의 너럭바위나 산 정상에서 놀빛이 곱게 물든 저녁 풍광을 즐기는 일은, 요즘 같은 가을에는 더 더욱 나를 황홀케 하지요. 나는 맑게 정화된 가슴으로 감미로운 슬픔에도 취하며 내가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음에 대해 하느님께 무한히 감사하기도 한답니다.
나는 산을 오를 때마다 아내에게 감사하곤 합니다. 내가 다른 걱정 없이 오로지 읽고 쓰는 일에만 열중하다가 저녁 무렵 산행을 할 수 있는 것이 다 아내 덕이기 때문이지요.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는 해가 긴 여름에는 퇴근 후에 나와 함께 산을 오르기도 하지만, 요즘같이 해가 짧은 때는 곧바로 집으로 퇴근해서 저녁 준비를 해야 하지요.
남편의 미련 맞은 보증빚 때문에 봉급을 거의 빼앗기다시피하며 살던 눈물겹던 시절에도, 자기가 번 돈으로 옷 한 벌 사 입어보지 못하고 살면서도 남편에게 눈 한번 흘기지 않은 아내에게 나는 참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답니다.
유명 작가가 못되는 나의 고료 수입이라는 것도 너무 보잘 것 없는 데다가 쥐꼬리 만한 보수의 대학 강사직도 그만두었으니, 나는 그야말로 아내 덕에 사는 거지요.
아직 해가 동동한 시각에 산을 오르는 일은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습니다. 생업 전선에서 비지땀을 흘리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죄스러워지는 마음도 없지 않지요. 내가 불로소득으로 마냥 호의호식하고 웬만큼 방탕도 즐기며 살지는 않을지라도, 해가 동동한 시각에 산을 오르는 이런 상팔자를 하느님께서 어찌 보실까 하는 의문과 죄스러움은 늘 내 오금에 매달려 있는 것이기도 하지요.
매일 이른 아침 '당진화력'으로 출근했다가 때로는 야근도 하고 밤늦게 퇴근하는 뒷동의 용접 기능공 동생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에 오금 운동이 좀더 둔화되기도 한답니다.
그러나 동생은 오히려 나를 더 안쓰럽게 보는 눈치더군요. 별스럽게 돈을 버는 일도 아니면서 글을 쓰느라고 긴긴 시간 컴퓨터 앞에 매달려 있다가 일어서는 순간 현기증 때문에 몸이 휘청거리기도 하는 오십 넘은 형을 바라보는 동생의 눈빛에 연민이 차 있는 것을 느낀 적도 있지요.
그래도 나는 산을 오릅니다. 산을 오르면서는 늘 기도를 합니다. 일상 생활 중에 내가 제대로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은 산행을 할 때임을 절감하고, 기도를 하기 위해서 산을 오르기도 한답니다. 귀찮거나 몸이 다소 피곤할 때도 굳이 산행을 하는 것은 기도를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길이 험하지 않은 백화산을 오르면서 하기 적당한 기도는 '묵주 기도'지요. 산을 오르면서도 할 수 있는 묵주 기도가 있다는 것은 내게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니랍니다. 산기슭 등산로 초입머리에서부터 묵주 기도를 시작하면 태을암 너럭바위에 도착할 때까지 5단을 하게 됩니다. 묵주 기도 5단이 끝나는 시간에 정확히 일차 목적지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도 내게는 신비롭고 다행스런 일이지요.
(묵주(默珠)란 한 개의 십자가와 59개의 구슬이나 나무알을 여섯 마디로 엮은 염주 형식으로 된 천주교의 성물로 성모 마리아께 기도할 때 사용한답니다. 그 묵주를 손에 쥐고 하는 기도를 묵주 기도라 하는데, '장미화관', '장미 꽃다발'이라는 뜻의 라틴어 '로사리오'를 번역한 말이지요. 구슬 열 개씩을 엮은 다섯 마디 중의 하나를 1단이라고 하지요.)
내가 백화산을 오르면서 묵주 기도를 하는 것은 20년도 더 된 버릇이지만, 묵주 기도의 '지향'을 정해 놓은 것도 10년이 넘었지 싶습니다. 내 묵주 기도는 매단마다 지향이 다르지요. 제1단은 '세계 교회와 세계 평화를 위해서'이고, 제2단은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의 공동선을 위해서'이고, 제3단은 '태안 교회공동체와 태안 지역사회의 공동선을 위해서'이지요. 그리고 제4단은 '지동환 안셀모(선친)님과 나의 모든 조상님들과 친척 친지 은인들의 영혼을 위해서'이고, 제5단은 '부모 형제 친척 친지들과 모든 은인들의 가정을 위해서'이지요.
지난봄 가족들과 함께 등산을 한 날 내 묵주 기도의 그 지향들에 대해서 잠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지요. 올해 중학교 2학년인 내 딸아이가 제4단과 5단의 '은인'들에 대해서 의문을 표하더군요. 특히 죽은 이들 중에서도 아빠가 기도로 보답을 해줄 정도의 은인들이 아빠에게 있다는 사실이 딸아이에게는 신기한 모양이었습니다. 대체 그들이 어떤 이들이냐고 딸아이는 물었습니다.
"아빠는 고등학생 때부터 염습을 했단다. 죽은 이의 몸―시신을 잘 닦아서 옷을 입혀 주고 베로 싸서 묶고 하는 일을 염습, 또는 염이라고 하는데, 아빠는 그 일을 많이 했어. 아빠가 정성껏 염을 해서 저 세상으로 잘 가시게 해 드린 이들이 아마 백 명도 넘을 걸."
고등학생 때부터 염을 한 것은 태안 교회 초창기 시절에 신자들이 많지 않아 손이 부족해서였지요. 별의별 시신을 다 만져보았답니다. 지금은 시신을 장지로 옮기는 일을 이 시골에서도 모두 장의차로 해결하지만, 상여를 많이 사용하던 시절에는 상여도 수없이 메었답니다. 완전히 염장이에다가 상여꾼을 겸한 셈이었는데, 염장이 노릇은 아마 죽는 날까지 하게 될 겁니다.
상여를 메던 시절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지요. 시를 공부하던 한 후배가 상여를 멘 나를 보더니 질겁을 하더군요. 그러고는 전화로 항의를 하더군요. 명색이 소설가라는 양반이, 지역에서 유명 인사 축에 드는 분이 어떻게 상여를 멜 수 있느냐고. 나는 웃으며 대답했지요.
"나는 작가이기에 앞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일세. 내가 작가라는 것보다 천주교 신자라는 게 더 중요하네. 그래서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상여를 멘 거야. 물론 앞으로도 또 그럴 거구…. 난 조금도 불편하지 않으니 아예 그런 걱정 말게."
그 친구는 이해하지 못하는 기색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지금은 태안에서 살지 않고 소식도 없지만 그때로부터 10년도 훨씬 더 지났으니, 지금쯤은 내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지금은 교회의 '연령회'도 잘 운영되고 있고 손도 많아져서 상이 날 때마다 매번 내 손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은 상가에 가서 염습 봉사를 하곤 하지요.
"아빠가 정성껏 염을 해서 저 세상으로 잘 가시게 해 드린 분들이 모두 아빠께는 은인이란다."
"왜요?"
딸아이는 아빠의 말을 냉큼 이해하지 못해서인지, 뭔가 감이 잡히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인지, 눈빛이 한결 또렷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분들은 대개 살아 계실 때 아빠와 인연을 맺은 분들이야. 죽은 다음에도 아빠와의 인연이 더욱 확실해진 분들이고…. 그분들이 나로 하여금 그런 좋은 봉사를 하게 해주셨으니 그것도 고마운 일이고, 지금은 또 나로 하여금 그런 기도를 하도록 해주시니 그것도 고마운 일이지. 내가 그분들을 위해서 하는 기도가 실은 나를 위한 기도이기도 하단다. 내가 그분들을 위해, 즉 남들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하면 할수록 하느님은 기뻐하실 테니 말야. 하느님이 나를 얼마나 좋게 보시겠니. 그러니까 결국은 내가 그분들의 덕을 보는 셈이지."
"그래서 그분들이 모두 아빠의 '은인'들이라는 얘기로군요?"
"아빠의 '은인'들은 돌아가신 분들, 아빠가 염을 해드린 그분들뿐만이 아니야. 살아 있는 분들 중에도 많아. 이 세상에서 아빠와 이런 저런 인연을 맺고 살아가는 그 모든 분들이 다 은인이야."
"알아요. 그 모든 분들을 위해서도 아빠가 묵주 기도 제5단을 바치시니까요."
딸아이는 환한 표정으로 웃었습니다. 딸 자랑을 하면 '팔불출'에 속한다지만, 나는 딸 자랑도 곧잘 하며 산답니다. 공부도 잘 해서지만, 심성이 워낙 착해서 나는 늘 하느님께 감사하곤 한답니다. 유치원 시절부터 지금까지 평일 미사에도 빠진 적이 거의 없지요. 텔레비전 앞에서 재미있는 만화영화나 몹시 좋아하는 그룹 가수 '신화'가 나오는 연예 프로를 보다가도 성당 갈 시간이 되면 군소리 없이 일어서는 아이지요.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평일미사 오르간 반주를 전담하는데, 한 달씩 아침과 저녁을 바꾸는 주일 미사의 오르간 반주도 책임을 다 하지요. 성가대 연습 반주에다가 어떤 때는 주일 본 미사에도 반주를 하고….
또 하루 백화산을 오르며 나는 묵주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에 열중하다보면 산을 오르는 일이 별로 어렵지 않지요. 기도에 열중한다는 것은 기도 지향과 관계되는 일이나 사람들을 떠올린다는 얘기이기도 한데, 그러다 보면 꽤나 힘이 드는 고비도 어려움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면서 오르게 되고, 나중에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좀더 신비스러워지는 기분도 갖게 되지요.
일단 일차 목적지인 태을암에 도착하면 나는 우선 대웅전 쪽을 향해 머리 숙여 절을 한 다음 마애삼존불 바로 밑에 있는 샘으로 가서 물부터 마십니다. 두레박으로 물을 퍼올린 다음 플라스틱 바가지에 옮겨 담아서 마시는데, 내게는 또 재미있는 버릇이 있답니다. 성호를 긋는 것은 물론이고, 물을 네 모금씩 세 번에 걸쳐 도합 열두 모금을 마시는 거지요.
나는 의식적으로 3이라는 수와 4라는 수를 좋아합니다. 이것도 꽤나 연조가 있지요. 3을 좋아하는 이유는 '안전수'라는 것보다도 삼위일체 하느님과 삼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그 부활과 관계되는 수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나는 3보다도 4를 더 좋아합니다. 사람의 사지, 밥상이나 책상 다리, 자동차의 바퀴, 사계절 따위를 생각하면 4라는 수가 너무 좋습니다. 그리고 성서에는 40주야 동안 비가 내린 '노아의 방주' 사건으로부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40일 동안 지상에 머물다가 승천하신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4라는 숫자가 결부되는 중요한 사건들이 아주 많지요.
그런데 내가 4라는 수를 좋아하는 것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죽을 사(死)자를 결부시켜 4라는 수를 재수 없는 수로 여기고 기피하는 현상에 대한 반감 때문이기도 하답니다. 넉 사(四)와 죽을 사(死)는 우리말의 발음만 같을 뿐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오늘날에도 일부 한국 사람들이 숫자 4를 기피하는 현상을 나는 안타깝게 생각하는 거지요.
아무튼 나는 깨끗하고 맛좋은 샘물을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수만큼 열두 모금을 마시니 배가 부를 정도로 마시는 거지요. 그러고 나서는 또 성호. 절간에 와서 사찰 소유인 샘물을 마시면서 성호를 긋다니, 조금은 경우 없는 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슬며시 들곤 한답니다. 그렇지만 스님들께는 좀 미안해도 부처님께는 죄송스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너그럽게 이해를 해주실 테니까요.
절에 올 때마다 부처님께 예를 드리는 내 행위를 하느님께서 좋게 보시리라는 내 '믿음' 만큼….
물을 마신 나는 다시 되돌아서서 태을암 바로 옆 너럭바위로 갑니다. 늘펀한 너럭바위의 편편한 곳으로 가서 우선 체조부터 합니다. 한 가지 동작을 네 번씩 반복하는 것은 물론이지요. 그런 다음에는 너럭바위 바로 옆에 설치되어 있는 운동 기구들 중 원형의 발판을 좌우로 돌리는 허리운동 기구로 가서 120번 회전 동작을 반복합니다. 그러고는 몸 부딪치기 운동을 하기 똑 알맞게 생긴 작은 바위 앞으로 갑니다.
그 바위의 머리끝을 잡고 서서 바위 복판에 정확히 복부를 54번 부딪치고, 이어서 등을 54번 부딪칩니다. 바위에 몸을 부딪칠 때마다 쿵쿵 울리는 바위의 미세한 진동이 아주 좋습니다. 몸 속 구석구석까지 바윗돌의 그 진동이 미치는 듯한 느낌이 정말 상쾌하지요.
내가 바윗돌에 복부와 등을 54번씩 부딪는 것은 올해의 내 나이가 벌써 그만큼이기 때문이랍니다.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러운 나이지요. 작년에는 53번을 부딪쳤고 올해는 54번을 부딪치고 있으니 내년에는 55번을 부딪칠 테지만, 나는 그렇게 내 나이만큼 바윗돌에 내 몸 부딪치기를 반복할 뿐입니다. 나는 그저 다만 그럴 뿐입니다. 아무런 깨달음도 얻지 못하고 여전히 안개 속 같은 미혹의 세계를 헤맬 뿐이지요. 내가 감히 믿고 따르는 예수님의 신발끈조차 제대로 붙잡지 못하는 채….
내가 내년에도 이곳에 올라와서 바윗돌에 몸을 55번 부딪는 행사를 계속할 수 있을지, 과연 그 수를 몇 회까지 늘릴 수 있을지, 60회를 돌파하고 70회까지도 연장해 갈 수 있을지도 나로선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내 아이들이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는 나이까지는 나도 살고 싶은 소망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실지도 안개 속처럼 불투명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세속적인 무리한 욕심에 연연하지 말고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살 일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왜 그러지를 못하는 것일까….
내 나이를 되새기는 운동을 마치고 난 다음에는 신발과 양말을 벗고 너럭바위의 우툴두툴한 표면을 밟는 운동을 합니다. 3, 40보 정도가 필요한 너럭바위 일주를 20회 정도 반복합니다. 이때 많은 생각을 하지요. 갖가지 생각의 단초며 더께들이 이때 얻어지곤 합니다.
생각을 좀더 깊이 하고 싶으면 다시 신을 신고 산의 정상으로 발을 옮깁니다. 묵주 기도를 2단쯤 하다보면 정상에 다다르게 됩니다. 놀빛이 비치는 산의 정상에 서서 우선 잠시 태안읍의 전경을 굽어본 다음 북쪽 가로림만의 풍광에 취하고, 동북 방향의 팔봉산, 동남쪽의 천수만, 남쪽의 몽산포 마검포와 안면도, 서쪽의 가의도, 서북쪽의 학암포 근처 바다를 조망하다보면 나는 어느덧 무심의 경지에 젖어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제는 저녁놀이 더욱 아름다운 가을의 정취 속에서 태안반도의 풍광에 취하고 무아의 경지에 빠져들고 하면서도 요즘의 내 삶과 관련하여 많은 생각들이 우러오르는 것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계속>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