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역에 서 있었다

방민호의 <문화칼럼> 김소월 시비를 만나고 난 후

등록 2001.11.20 07:22수정 2001.11.20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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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밤 나는 지하철 왕십리역 위에 서 있었다.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고 난 다음이었다.


오스트리아 작가가 쓴 작품을 번역, 번안해서 올린 <쥐사냥>이었다. 현대문명은 쓰레기와 같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렇다면 무대 배경을 이루는 쓰레기장은 매우 상징적인 장치일텐데 정작 동원된 세트는 진짜 쓰레기들이었다.

이 대목에서 연극은 갑작스레 '리얼리즘' 작품이 되었다. 마지막 공연이라 그런지 지하2층의 소극장은 먼지가 꽉 차 호흡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가난한 연극이 안쓰러웠다.

그리고 나서 나는 지하철 왕십리역 위에 서 있었다. 가난에 시달리다 스스로 죽음을 택한 일제 때 시인 김소월의 시비가 거기에 있었다. 서울의 가난한 변두리였던 왕십리에서 시인은 죽죽 내리는 여름 장마비를 보며 자기의 고단한 삶을 한탄했었다. "비가 온다 / 오누나……"로 시작되는 시편 <왕십리>가 바로 그것이다.

왕십리역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이 시비를 보기 위해서 일부러 가보아도 좋으리라. 전국 여러 곳에서 시비라 이름 얻은 돌들을 보았으되 이만한 시비는 보지 못하였다.

소월 김정식의 흉상도 <왕십리> 시편을 새긴 돌조각도 참으로 예술적이었다. 모두 값진 노력을 기울여 얻은 훌륭한 작품들로, 특히 시비는 <왕십리>의 싯구를 상징적으로 조각한 멋드러진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구름도 山마루에걸녀서 운다"는 <왕십리>의 마지막 행이 아름다운 돌로 둔갑해 있었던 것이다. 이 해석은 동행했던 시인의 것이다. 이에 이르러 그날 나의 마음의 색조는 비로소 밝아졌다.

요즘 문학에 논란도 시비도 많다. 더불어 옛 시인의 시비가 지방자치단체의 촌스러운 업적이 되기 일쑤이다. 얼마 전에는 살아 있는 시인의 졸렬한 시편이 기계톱으로 썬 싸구려 대리석 위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기까지 했다. 실소를 금치 못할 일이었다. 바야흐로 문학은 값싼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그런 천박한 풍조에 가려진 이런 훌륭한 작품도 있다. 고단한 시 <왕십리>가 하룻밤을 사치할 수 있는 기품있는 조각으로 둔갑할 수도 있는 오늘이다.


동행한 시인을 지하철역 아래까지 바래다 주었다. 나는 다시 역 위로 홀로 나와 누가 도대체 이 아름다운 시비를 세웠는지 보고 싶었다. 역시 지방자치단체인 '성동구'였다. 왕십리 사람들은 이 시비 하나로 그곳에 살고 있음을 자랑해도 좋으리라. 조각가는 임동락이라는 분인데 글씨를 쓴 분의 이름은 송구스럽게도 잊었다.

한 나라의 시인을 그 이름에 걸맞게 가꾼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문학은 그렇게 하나의 살아있는 문화가 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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