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세를 벗어나 선암사에서 차 한잔을

현존하는 차의 성인, 지허(指墟)스님을 만나다

등록 2001.12.24 15:00수정 2001.12.26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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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경이 있는 풍경 ⓒ 김영조
얼마 전 영동고속도로의 한 휴게소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곳에는 전통찻집이 있었는데 고속도로 휴게소에 전통찻집이 있으리라 생각을 못했던 나로서는 무척이나 반가웠다. 한데 그 곳의 차림표를 보니 녹차뿐이 아니라 쌍화차, 생강차, 유자차, 커피 등이 있는 것이 아닌가? 커피, 쌍화차도 전통차?

물론 찻집들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전통차가 무엇인지 분명히 할 필요는 있지 않을까? 쌍화차는 쌍화탕이어야 하고, 생강차, 유자차 등은 '~즙'으로 불러야 하고, 전통차가 아닌 대용차의 범주에 드는 것이다. 그럼 녹차가 전통차일까? 보통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들 알고 있는데 그것은 오해라는 주장을 하는 분이 있다. 그 분은 바로 태고종의 본사인 선암사의 주지이신 지허스님이다.


“녹차는 일본에서 역수입된 차입니다. 분명 전통차는 따로 있습니다. 물론 녹차를 없애자는 것도, 나쁘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녹차를 전통차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지허스님은 힘주어 말하고 있었다.

지허스님이 계신 곳을 넓은 선암사 경내에서 찾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타전’에 계시다는 얘길 들었지만 몇 번을 물어보고 나서야 소박한 한 요사채 앞 댓돌에 놓인 스님의 신을 볼 수 있었다.

▲ 차를 내시는 지허스님 ⓒ 김영조
스님이 입고 계신 승복은 몇 번이나 꿰매 입은 것이다. 그러나 꿰매 입은 것을 검소한 것으로 오해할 것을 저어하신 것인지 스님은 여러 옷이 있지만 이 옷이 가장 편해서 계속 꿰매어 입는다고 강조하신다.

스님은 너무나 소박하시다. 큰스님이신데도 명망가들의 그런 권위를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소위 큰 사람들이 권위를 위해 말을 무척이나 아끼고, 근엄한 표정을 짓는 것과는 아주 다른 모습으로 2시간여 거침없이 말을 하신다. 그리고 간간히 드린 우리의 말도 스스럼없이 경청하신다. 기거하고 계신 방도 그저 평범한 방에 불과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우리의 전통차는 녹차와 품종부터가 다릅니다. 녹차는 일본에서 개량한 야부기다종으로 뿌리가 얕고, 잎이 무성합니다. 그래서 대량생산을 하는데 아주 좋을 것입니다. 어쩌면 저렴한 차를 마시는데 장점이 될 수도 있지요. 하지만 뿌리가 얕으니 비료를 줄 수밖에 없어서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토종 야생차는 뿌리가 곧고 땅 위의 키보다 3~4배가 큽니다. 그래서 암반층, 석회질층에 있는 담백한 수분, 무기질을 흡수하여 겨울에 더 푸르고, 꽃이 핍니다. 그래서 녹차에 비해 우리의 전통차가 깊은 맛이 있는 것입니다.”

▲ 지허스님이 기거하시는 소박한 요사채 ⓒ 김영조
스님은 말씀하시는데 전혀 꾸밈이 없다. 그렇다고 녹차의 가치를 깎아내리려는 의도도 엿보이지 않는다. 야생차는 재배하지 않으니 양도 적고, 일일이 수공으로 덖어내기에 값이 비싸질 수밖에 없어 값싼 녹차의 효용성을 부인하지 못한다는 말씀이셨다.


우리나라에 나고 있는 차나무는 야부기다종이 85% 정도, 변종이 10% 정도이며, 토종은 5% 내에 불과하다고 한다. 선암사를 비롯, 벌교의 징광사, 낙안의 금둔사, 보성의 대원사 주변에 남아 있는 것이 토종야생차일 뿐이다.

하지만 이 야생차도 원래의 자생 차나무는 아니며, 삼국시대에 전래된 차가 2천여 년을 지나면서 풍토화된 것이라는 이야기다. 원래의 자생차는 백산차(白山茶)가 있었지만 멸종된 상태라고 한다.

▲ 선암사 경내의 아름다운 길 ⓒ 김영조


▲ 선암사 경내의 아름다운 길 ⓒ 김영조

“저는 현재 보편화된 일본식 다도는 지양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무릎을 꿇고 마시라니 젊은이들은 모두 도망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저 편하게 마시는 것이 중요하며, 초의스님이나 다산선생이 무릎꿇고 마셨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스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그렇습니다. 일본은 우리에게 받아간 문화들을 모두 극진히 모셨는데 바로 바둑, 도자기, 차 등입니다. 바둑도 무릎을 꿇고 두며, 차도 무릎을 꿇고 마시는데 같은 맥락입니다. 일본은 차에도 존칭을 붙이는데 우리가 그걸 따라갈 필요는 없겠지요.”

마지막으로 스님은 몇 가지 당부를 잊지 않으셨다.

“차에 대한 공부를 할 때 초의스님이나 다산선생도 좋지만 진정한 차의 성인이라 불릴 수 있는 당나라 육우(陸羽, 727-803)가 쓴 '다경(茶經)'에 대한 공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 책에 보면 ‘차는 구전구수(口傳口受)이다’ 즉 ‘차는 입으로 전하고 입으로 받는다’라고 하는데 아주 소중한 이야기입니다. 그 말은 ‘사람은 고정시켜놓으면 관념이 생긴다. 고정관념은 위험하다’라는 뜻입니다.”

▲ 요사채를 둘러싼 아름다움 ⓒ 김영조

스님은 한 사람에게 “도둑놈이다”라는 말을 계속하게 되면 결국 도둑이 되어버리게 된다는 말을 강조하신다. 차는 찬 음식이니 뜨겁게 마셔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으셨다. 그런데 스님은 차를 덖은 지 4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차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다는 말씀도 하신다.

스님과의 대화 도중 밖에서 갑자기 “뽕따러 가세”하는 노래가 들리며 소란스럽다. 절에 구경온 관광객들인 모양인데 정숙한 절의 분위기를 일시에 깨버리는 폭거 같아서 안타깝다. 잠시 대화는 중단되었지만 더 이상 이 산중다담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외출할 일이 있다며 일어나신다. “오후에 산중다담을 여신다면서요?” “오늘은 오후에 할 일이 있어 다른 사람이 대신할 것입니다. 지금 다담을 했으니 오늘은 이미 했지요.” 웃으시면서 우리를 보내신다.

▲ 한 요사채를 배경으로 완전히 옆으로 누운 소나무 ⓒ 김영조

스님이 거처하시는 요사채의 뒷켠으로 가보았다. 여기도 야생차가 널려 있다. 초겨울인데 짙은 녹색의 차나무가 소박한 꽃 몇 송이를 보여주고 있다. 선암사 주변에는 야생차나무 외에도 감나무와 대나무 천지이다. 따는 사람이 없어 아직도 많은 감들이 달려 있다. 절에서 감을 따지 않는 것은 스님들이 짐승들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 아닐는지.

“청설모다!” 아내가 말했다. 청설모가 감을 따가지고 간다. 그런데 갑자기 툭하는 소리가 난다. 청설모가 놀랬는지 감을 떨어뜨렸다. 청설모는 얼마나 허탈할까? 아니 스님의 마음을 읽은 청설모가 내게 감을 선물한 것은 아닐까? 청설모가 탐냈던 감이면 맛이 있을 거라며 아내가 내게 감을 집어준다. 역시 감은 무척이나 달다.

선암사 경내를 돌아본다. 참 소박하고 정감 있는 절이라는 생각을 아내와 함께 한다. 들어오는 도로를 포장하려다가 자연을 훼손한다는 반대여론에 따라 그냥 뒀다는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흐뭇할 수밖에 없다. 처마 끝에 달린 풍경이 참 아름답다. 간간히 들리는 풍경소리는 속세에 찌든 내 귀를 깨끗이 씻어주고 있다.

선암사의 뒤간 전통적인 절집 화장실 ⓒ 김영조

돌아보다 보니 허름하지만 정감 있는 조그만 집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여기도 작은 현판이 붙어 있다. “뒤” 무슨 말일까? 한참 곰곰이 생각해본 뒤에야 옛사람들은 오른쪽부터 글씨를 썼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럼 “뒤” 아하 화장실인 모양이군.

안쪽을 다시 보니 “대변소(大便所)”라는 글씨가 보인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이 뒤은 유명한 곳이란다. 전통적인 절집 화장실로 환경친화적인 이층구조여서 재래식 변소치고는 냄새도 안날 뿐더러 밑에서는 바로 거름으로 쓸 수 있다나. 또 나무결을 잘 살려 지어서 아름다운 건축물의 완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절도 예외없이 중창불사가 한창이다. 대웅전을 보수하고 있다. 선암사의 아늑하고 소박한 모습에 누가 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선암사(仙岩寺)는 백제 성왕 7년(529년) 아도화상이 개산한 절로 고려시대 의천대각국사(1092) 때는 100여 동에 이르는 대가람과 2천여 명의 스님이 정진했던 큰 절이었다고 한다. 현재 선암사는 한국불교 태고종(太古宗)의 총본산이며, 사적 및 명승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암사 일주문 전남 유형문화재 제96호로 단층 맞배기와집이다. ⓒ 김영조

선암사 주지 지허스님은 지금 살아 있는 차인(茶人) 가운데 가장 오랜 세월을 통해 체득한 비법으로 한국 전통차의 맥을 가장 완벽하게 잇고 있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스님은 13살에 출가한 이후 선암사 칠전선원에서 ‘다각'이라는 차를 만들고 시중하는 일을 맡은 이래 오늘까지 40년이 넘도록 매일 차와 함께 사셨다.

선암사의 차 덖는 요사채 칠전선원 뒤와 일주문 앞에 있는 차밭은 무려 2만5천 평이다. 이곳 선암사에선 매주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 ‘지허스님의 산중다담(山中茶譚)’을 연다. 지허스님이 직접 만든 ‘금화산잎차’와 스님의 제자들이 만든 칠전선원차를 마시며 한국 전통차, 그리고 삶과 세상에 관한 담론을 주고 받는다.

‘우리의 전통차는 무엇인가?’를 주제로 일본차인 `녹차'가 한국의 전통차인 것처럼 왜곡되고, 잘못된 외래문화가 우리의 생활 속에서 일으키는 병과 그 치유책 등에 대한 `차 나눔'이 ‘지허스님 산중다담’이다. 여기에는 누구나 무료로 참가할 수 있다. (011-320-0201, 061-754-5636).

선암사 야생차밭 2만5천평에 달하는 아름다운 야생차밭 ⓒ 김영조

아내는 발길을 돌리려 하지 않는다. 선암사를 감싸안고 있는 조계산은 어머니 같은 포근한 느낌을 주며, 선암사와 그 주변은 청정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조용히 보여준다. 계곡, 숲 등을 살펴보고 있으면 선암사는 사철 가릴 것이 없이 언제 와 봐도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람은 누구나 속세에 찌들어간다. 하여 오랜 세월을 산 사람은 얼굴에 그 때가 묻어 있다. 아름답게 살려면 선암사에 와서 아름다운 새소리와 풍경소리를 듣고, 산중다담에 참가하면 좋으리라. 그러면 조금씩이라도 때는 씻겨지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편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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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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