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로하신 부모님 모시고, 두 아이 데리고 호주 멜번에 머문 지 보름째이다. 이름난 곳을 구경하는 몇 번의 일정을 빼고는 한정된 지역에서 남다를 것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노인분들께 유심히 눈길을 돌리게 되는 것은 숨길 수 없다. 마켓에서 혼자 카트를 끌고 장을 보시는 할아버지, 책 한 권 들고 공공 도서관 책 반납 줄에 서 계신 할머니, 커피와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간이 음식점에서 자주 보게 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런데 어느 날, 장보러 간 마켓 계산대에 줄을 서 있으면서 고개를 들어 이 쪽 저 쪽 둘러보던 중에 눈길을 잡아끄는 반가운 글씨 하나를 만났다.
물건 배달 시간과 비용을 적어 놓은 안내판이었는데, 요일과 시간을 죽 적어 놓은 아래쪽에 '일반 배달 요금 $4.35, 노인을 위한 배달 요금 $3.25'라고 씌어 있었다.
노인을 위한 배달 요금이 싼 것은, 노령 연금 수혜로 인해 노인 인구가 많은 지역의 경제가 활발하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이고 관광지 등에서 노인들의 입장료를 할인해 주는 것 등에 비추어 볼 때 당연하게 여겨졌다.
오히려 '노인'을 뜻하는 단어로 'Senior citizen(선배 시민)'이라고 적혀 있는 것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1998년으로 기억되는데, 한국사회복지협의회에서 '노인'을 대체할 새로운 용어를 공모한 적이 있었다. 늙은이, 늙은 사람을 뜻하는 '노인'은 듣는 사람 누구나 결코 유쾌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단어이기에, 그 때의 용어 공모는 의미 있는 일이었고 바로 그 때 당선된 것이 요즘 널리 쓰이고 있는 '어르신'이다.
외국의 경우 '노인'을 뜻하는 단어를 살펴보면 노인(The aged), 나이든 사람(Elderly people)에서부터 황금기(Golden age), 제3세대(The third age), 선배 시민(Senior citizen)등이 있고, 일본은 숙년(熟年), 실년(實年), 실버(Silver) 등을 쓰고 있다.
나는 '선배 시민(Senior citizen)'이란 말을 가장 좋아한다. 노년기가 다른 연령기와 동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삶의 자연스런 한 시기임을 생각해 볼 때, 선배라는 말이 주는 의미가 보다 폭넓고 그들도 사회의 한 구성원이라는 연결감을 주기 때문이다.
흔히 젊은이들이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어르신들은 변화에 대해 민감하지 못한데다가 변화 자체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어, 변화를 지지하는 정도만으로도 무척 앞선 의식을 가졌다고 평가받곤 한다. 그러나 어르신들이 바뀔 때 비로소 우리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우리들의 '선배'이기 때문이다.
부모로, 조부모로만 그들을 볼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걸어갈 길을 앞서 걸어간 선배들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들이 조금은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흔히 여성들의 영원한 과제라는 고부간의 문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배타적으로 등을 돌리기만 하는 세대간의 문제도 이 땅에서 살아온, 또 이어서 살아갈 선후배의 관계로 본다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책에서 글씨로 읽기만 한 '선배 시민(Senior citizen)'이란 단어를 생활 속에서 직접 접하면서 나 역시도 가까이 나의 부모에서부터 그들이 나의 인생 선배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새겨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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