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그러나"

영화 속의 노년(19) 'Alone'

등록 2002.01.10 09:17수정 2002.01.10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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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유선 방송 채널 28에서 지난 해 말 방영된 스페인 영화 'Alone'은 가족간, 세대간의 이야기를 모녀를 중심으로 해서 풀어나가는 영화이다.

도시에서 홀로 살고 있는 서른 다섯의 딸 마리아의 집에, 아버지의 수술 때문에 지방에서 올라온 엄마가 머물게 된다.


마리아가 어렵게 구한 일은 힘이 무척 많이 드는 호텔 청소 일. 게다가 임신 사실을 확인하고 애인에게 알리지만 그는 아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결국 술에 의존하는 정도는 점점 심해지고…. 외로운 도시의 방 한 칸에서 마리아는 그렇게 살고 있다.

열두 살 때부터 하녀 일을 해온 엄마. 평생 집안 살림하며 남편과 아이들 수발로 잔뼈가 굵은 엄마는, 황량한 딸의 집에 꽃이 담긴 화분부터 놓아두는 사람이고 손에서 뜨개질감을 놓지 않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쓰다버린 흔들의자를 아직도 쓸 만하다며 주워와서 딸의 집에 들여다놓는 그런 엄마이다.

냉랭한 딸, 도시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엄마. 딸에게 무얼 좀 먹으라고 하면 딸은 간섭하지 말라며 신경질을 내고, 그들의 하루하루는 살얼음판을 딛고 서 있는 것만 같다.

그러던 중 엄마는 우연히 아래층 할아버지와 인사를 나누게 된다. '늙은이 두 명이 산다'고 말하는 그 할아버지는 아내를 잃고 개 아킬레스와 둘이서 연금으로 살아가고 있다.

엄마는 할아버지가 음식 만드는 것을 도와준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거동을 못하는 일이 일어나자 아이들을 돌봐온 그 마음으로 기꺼이 손을 내민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담담하고 편안한 마음의 나눔이 눈길을 끈다.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퇴원하기까지의 회복기를 보내고 있는 마리아의 아버지. 술, 도박,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구타, 의처증. 공부하고 싶어했던 마리아에게 구식의 아버지는 그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병원에 누워 있는 지금도 그는 그대로이다. 마리아는 그런 아버지와 대면하는 것조차 피하며 지내고 있고, 그 모든 걸 참고 살아온 엄마가 싫다. 그러나 마리아는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아버지의 기질을 그대로 닮았다는 것을.


아버지가 퇴원을 해서 엄마는 고향으로 떠나고 다시 마리아는 홀로 남겨진다. 엄마가 주워온 흔들의자와 곳곳에 놓아둔 화분의 꽃들과 함께...

그때 문을 두드리는 아래층 할아버지. 문을 꼭꼭 잠그고 살아온 마리아는 문을 열게 되고, 그들은 많은 싸움과 논쟁을 거쳐 친구가 되어간다. 임신 사실을 고백하는 마리아에게 할아버지는 아이에게 '양할아버지'가 돼주겠다며 낳을 것을 권한다. 하나 있었던 아들을 어릴 때 잃어서 자신은 결코 '할아버지'가 될 수 없었노라고 고백하면서.

시간이 흘러 엄마의 묘소 앞에 선 마리아와 아래층 할아버지. 마리아는 자신이 낳은 딸의 이름을 엄마 이름을 따서 로사로 지었다며, '양할아버지'는 아이의 할아버지일 뿐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라고 고백한다.

사람은 누구나 홀로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존재이다. 그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한 번뿐인 인생이지만 그래도 함께 걸어가는 존재가 있어, 마음 붙이고 손길을 나누며 조금은 덜 외롭게 이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마음마저 꼭 닫고 살아가던 마리아에게 엄마는 가장 큰 선물을 남기고 갔다. 아래층 할아버지와의 만남은 마리아가 자신의 삶을 좀더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마리아는 엄마에게서 가장 큰 선물을 받았고 아름다움으로 엄마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뜨개질로 마리아에게 조끼를 만들어준 엄마는 맞는지 입혀 보며 "이제 주머니와 단추만 달면 된다"고 이야기한다. 엄마가 떠난 뒤 엄마가 두고 간 뜨개질 가방에서 주머니를 꺼내 마리아가 조끼에 주머니를 단다.

많은 딸들이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쩜 엄마와 딸들은, 엄마가 만들어 준 조끼에 딸들이 주머니를 달고 단추를 다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지금도 우리 엄마는 부엌에서 언니와 내가 점심에 먹을 국수를 삶고 계시다. 엄마를 멀리 떠나 이국에서 살고 있는 큰딸의 "아, 엄마 국수 먹고 싶다"는 한마디 말에 행복해 하시면서 말이다.

덧붙이는 글 | (Alone , 원제 Solas, 1999년 / 감독 Benito Zambrano / 출연 Maria Galiana, Ana Fernandez)

덧붙이는 글 (Alone , 원제 Solas, 1999년 / 감독 Benito Zambrano / 출연 Maria Galiana, Ana Fernand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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