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멜번에 머문 지 20일 째. 이곳에 살고 있는 언니의 안내로 기차를 타게 되었다.
멜번 시내에서 1시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곳은 거의 다 기차로 연결되어 있어 출퇴근과 학생들의 등·하교는 주로 기차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멜번 시내를 비롯해 각 지역에는 또 트램(Tram, 전차)이 말 그대로 거미줄처럼 이어져 여기 저기서 출발하고 서고 하는 통에, 버스와 승용차의 물결만 보고 살아온 나와 아이들은 한동안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역무원이 보이지 않는 동네 역에서 자동판매기에 동전을 넣고 기차표를 사서 역시 기계로 개찰을 한 후, 도착한 기차의 문을 내 손으로 직접 열고 기차에 탔다. 의자의 배열만 조금 다를 뿐 우리나라의 여느 기차 칸 혹은 지하철 칸과 다를 것은 없었다.
그래도 낯선 곳을 여행하는 사람의 호기심은 멈출 줄 몰라 여기 저기 두리번거리던 중에, 출입문 옆의 벽에 장애인 전용 구역을 나타내는 표시와 함께 안내문이 붙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이 자리는 요청이 있을 때 언제라도 노인과 장애인이 사용하도록 비워주어야만 합니다. 벌금 $100"
노인이나 장애인을 위해 자리를 요청했을 때 비워주지 않으면 벌금이라니!
우리나라의 경로석 논란이 떠올랐다.
노약자가 언제든지 앉을 수 있도록 무조건 비워두어야 한다, 젊은 사람들도 피곤하니 일단 앉았다가 노약자가 보일 때 양보하면 된다, 어르신들은 어르신들대로 젊은 사람들이 앉아 있으면 비켜달라고 할 수 없으니 아예 처음부터 비워두면 좋겠다, 일부러 비켜주지 않는 것이 아니니 정 피곤하면 양보를 부탁하자 등등 …
우스개 소리로 경로석은 경우에 따라서 노인도 앉을 수 있는 자리라고 한다. 아니 이제는 그것도 바뀌어서 경건하게 앉아서 노인을 생각하는 자리라고 한다.
노약자 본인 혹은 노약자를 위한 다른 누군가의 '요청이 있을 때'라는 것을 명시하고, 그래도 즉시 이행하지 않으면 '벌금'을 부과하는 이곳의 안내문과 젊은 사람들의 양보심에 호소하는 우리의 문화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르신을 공경하고 약한 이웃을 배려하는 인간의 기본 자세에 어느 것이 더 도움이 되고 실질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을까.
모든 일이 그렇듯 문화 역시 상대적인 것이어서 옳고 그름을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노약자가 자신의 자리로 지정된 곳을 비워줄 것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고, 옆의 누군가도 그 노약자를 위해 제3자에게 자리 양보를 요청할 수 있으며, 또 그것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벌금을 부과할 수 있는 사회적인 약속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 새로웠다.
반면에 이 나라에서는 노약자나 옆의 누군가가 요구를 해야만, 그것도 우리 돈으로 7만원에 가까운 벌금을 명시해야만 자리를 양보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니 그 또한 유쾌하지는 않았다.
자리 욕심이 있어서도 아니고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다. 단지 어르신들은 어느 한 곳 아프지 않은 곳 없이 불편하다 보니 앉을 자리부터 찾는 것이다. 뻔뻔하게 여기지 말고 허리 아프고 다리 아픈 것을 조금만 이해해 주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닐까.
역시 자리 욕심 때문도 아니고 일부러 못 본 척 눈감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젊은 사람들도 피곤하고 힘들다. 노약자석에 다가와 무조건 소리 지르며 부모도 없느냐고, 배운 바 없는 것들이라고 닦아세우는 어르신들에게는 공경의 마음마저 숨어버린다는 것을 알아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요청해 오기 전에, 또 벌금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사회의 약자들과 소통하고 배려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멜번의 기차 경험은 이렇게 또 한 가지의 이야기를 내게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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